2024.09.28 (토)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문호답사 기행(10)
미륵신앙이 숨쉬는 ‘어머니산’
김제 모악산 금산사

꽃비가 내린다. 바람이 문득 불면 힘겹게 꽃망울을 터뜨렸던 나무들은 힘없이 하얀 꽃잎을 눈처럼 허공으로 보낸다. 남도의 들녘엔 청보리 푸른 기운 가득하고, 봄으로 달려가는 냇가엔 노란 유채꽃 색상이 화려하다. 논산을 지나면 백제 무왕의 고향인 익산을 지나고, 조금 더 달리면 후백제 견훤의 근거지였던 전주(완산주)에 이른다. 전주를 지나면 김제땅이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호남들녘의 광활함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김제시는 매년 ‘지평선축제’를 개최한다. ‘얼마나 국토가 좁으면 지평선축제를 할까?’ 라는 서글픈 생각이 들지만 가진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새롭다. 동진강과 만경강 유역의 김제만경평야는 김제·만경 ‘외매미들’이라고 부른다. ‘외매미들’은 ‘너른 들’ 곧 평야를 말한다. 봉산들·부량들·죽산들·청하들·만경들·백구들 같은 비옥한 땅들이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지평선을 뒤로하고 어머니산을 찾아간다. 모악(母岳) 즉 어머니산이라는 말이다. 모악산(793m)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인근의 가없는 들녘을 앞에 두고 우뚝 솟아 있으니 오히려 다른 곳보다 높아 보였을 것이다. 산에서 태어나 산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 땅의 사람들이었기에 산다운 산이 부족한 주변의 사람들에겐 어머니같은 산이 아닐 수 없다. 중국 태산에 가면 한국사람들은 실망을 많이 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를 어린시절부터 익혔기에 무척 높은 산처럼 여기고 찾아가보지만 우리나라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산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망이 크다. 그러나 태산이 있는 곳은 중국 산동성.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도 변변한 산을 볼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 우뚝 솟은 태산은 그야말로 하늘에 닿아 있는 듯 높아 보였을 것이다. 김제 사람들은 이곳 모악산에 기대 살았다. 실제로 모악산에는 고대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터인 앙터신앙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예부터 이곳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터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이곳은 백제 유민들의 꿈의 성지가 되었다. 허무하게 무너져야 했던 백제를 그리워 하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었다. 이때 이들의 허물어진 가슴을 치유한 사람이 진표(眞表) 스님이다. 승 진표는 완산주(지금의 전주) 사람이다. 열 두 살에 금산사 숭제법사의 문하에 들어가 승려로서의 길을 걸었다. 유명한 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기 몸을 학대하여 참회하는 망신참(亡身懺)으로 수행을 하였다. 자기 몸을 쳐서 무릎과 팔이 다 부서지고 피가 비오듯 흘렀다. 결국 14일만에 지장보살을 만나 계율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뜻은 미륵보살에게 있었으므로 다시 용기를 내어 망신참을 했더니 과연 미륵이 나타나 점찰경을 전해주었다 한다. 진표는 ‘거룩한 문건’을 받고 금산사로 돌아와 해마다 단을 만들고 널리 법을 펼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졌다. 그래서 백제 유민들은 더욱 금산사를 아꼈다. 그는 이 금산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는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어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진표가 내세운 점찰법회는 윷놀이를 연상케 하는 나무 대쪽을 던져서 그 결과를 보고 참회하는 의식을 말한다. 딱딱한 종교의식이라는 격식보다는 놀이와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신앙과 수행의 장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옛 고구려땅과 백제땅의 유민들, 특히 백제유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미륵신앙운동은 훗날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에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견훤이 금산사를 원찰로 삼아 미륵신앙과 관계 맺은 이유도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금산사 미륵이길 원했던 견훤은 그의 아들 신검에 의해 이곳에 유폐되었고, 결국 왕건에게 의탁하여 자신 세운 후백제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미륵은 석가모니 사후 56억7천만년 후에 이 땅에 태어나 화림원 안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미륵불이 되고,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는 것이다. 56억7천만년. 100년도 살기 힘든 인간에겐 영겁의 시간이다. 56억7천만년이라는 숫자를 ‘먼 훗날에’로 해석되어야 하리라. 그래서 억압받고 소외된 계층은 이 세상에 내려와 그들을 구원할 미륵을 기다렸다. 그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궁예와 견훤을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허나 그들 역시 미륵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한낱 권력을 꿈꾸는 또 하나의 지배자였을 뿐. 금산사에는 미륵전(彌勒殿,국보 제62호)이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이는 모두 미륵의 다른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안에는 바닥에서 천정까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