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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長江) 문학기행(文學紀行)<2>

수필


구화산을 거쳐 만 하루를 더 상류로 헤쳐 가니 황학루, 악양루와 함께 중국 강남 3대 누각 중의 하나인 등왕각(滕王閣)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등왕각은 당 고조 이연의 22번째 아들이자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아우인 이원영이 그 지역 목사로 봉해져 부임한 후 8층으로 지은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강변 누각이다. 첫 건축 후 29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원영의 후임 목사였던 염백서가 베푼 연회에 참석한 시인 왕발(王勃)이 지은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왕발은 수나라 말의 유명한 수학자 왕통의 손자로서 당나라 초기(初唐) 4걸(傑)이라 불리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약관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산랑(朝散郎)이 되었고, 그 후에 괵주참군(虢州參軍)을 지냈다.

 

왕발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참신하고도 건전한 정감을 노래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고 특히 7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으로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그는 불과 26세였던 676년 8월, 교지땅(交趾令)에 좌천된 부친을 찾아가다가 배에서 떨어져 장강에 빠져 죽었다. 여기에서 당시 왕발이 염백서에게 올렸던 <등왕각서(滕王閣序)> 시 구절의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滕王高閣 臨江渚
佩玉鳴鑾 罷歌舞.
畵棟朝飛 南浦雲
朱簾暮捲 西山雨.

 

閑雲潭影 日悠悠
物換星移 度幾秋.
閣中帝子 今何在
檻外長江 空自流.

 

등왕각은 강변에 홀로 높이 서 있고
옥패소리 춤 노래 다 사라져 버렸네
아침에 구름은 남쪽 지붕에 걸리고
저녁에 빗물은 서쪽 주렴을 때리네

 

물 위에 비친 구름 유유히 떠 있지만
세월은 흘러가고 만물은 바뀌었네
옛 주인 제왕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난간밖엔 장강만 부질없이 흐르네.
                                                                                                                         

                                                                                                                            
이 시에서 보듯이 왕발은 흐르는 세월의 야속함과 장강의 아름다움을 능숙한 7언절구(七言絶句) 시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등왕각을 지나 장강을 거슬러 하루를 더 올라가니 주황빛 기와지붕에 웅장하기 그지없는 6층 누각 황학루(黃鶴樓)에 이르렀다. 등왕각이나 황학루 등 누각들은 그냥 생각하기 쉬운 일개 정자가 아니라 일본의 오사카성 같은 일종의 복합고층 궁전과 흡사했다.

 

황학루는 시선(詩仙)으로 칭송되는 이백(李白)의 시심이 스며 있는 곳이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라 불렸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다. 호는 청련거사(青蓮居士) 또는 적선인(謫仙人)으로 불리었다.

 

젊은 시절부터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고 한때는 현종과 양귀비 밑에서 궁정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방랑으로 끝난 비운의 시인이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써 현종과 양귀비의 연회장에서 지은 것이다.
 
이백은 벼슬아치인 하지장 등을 비롯한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하여 ‘술 속의 팔선(八仙)’이라 불렸으며 술에 취한 채로 황제의 부름을 받으면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가 56세 때인 755년 안사의 난으로 장안을 버리고 촉나라로 피신했지만 역모에 연루되어 투옥과 유배를 반복하다가 장강 삼협 근처에서 유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안후이성 당도의 현령이었던 이양빙에 의탁해 살다가 61세에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장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로 뛰어들어 익사했다고 한다.

 

황학루에서 친구 맹호연을 배웅하며 남긴 이백의 시를 돌아본다.

 

故人西辭 黃鶴樓
煙花三月 下揚州
孤帆遠影 碧空盡
惟見長江 天際流.

 

옛 친구는 황학루를 서쪽에 남겨두고
꽃 가득한 춘삼월에 양주로 떠나가네
단배는 푸른 하늘 저 멀리로 사라지고
하늘가로 흘러가는 장강만 바라보이네.

 

 

황학루를 뒤로하고 이튿날 우리가 탄 배는 처절한 역사의 편린을 간직한 적벽(赤壁)을 지나친다. 서기 208년 손권과 유비의 5만 군이 조조의 20만 대군과 접전하여 화공으로 대승을 거두고 이를 계기로 오(吳)와 촉(蜀), 그리고 위(魏) 3국이 정립(鼎立)하게 된다.

 

강변 바위에는 해서체의 붉은 글씨로 ‘赤壁’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삼국시대 오(吳)의 명장으로 적벽대전에서 위를 꺾었던 ‘주유(周瑜)’가 210년경에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적벽을 지나가니 유서 깊은 동정호(洞庭湖)와 악양루(岳陽樓)가 다가온다.

                                     
동정호는 장강과 연결된 드넓은 호수인데 연안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악양루는 노란 지붕에 처마가 한껏 치켜 올라간 모습이었다.
                                                                                                                            

층수도 3층으로 지금까지 보아온 등왕각이나 황학루보다는 좀 작은 규모였지만 호수와 수풀 등 주위의 풍광은 더 수려해 보였다.

 

두보(杜甫)의 유명 시 <등악양루(登岳陽樓)>는 시성(詩聖)으로 호칭되는 역대 중국 최고의 시인인 두보가 유랑생활 중이던 57세(768)에 동정호 악양루에 올라서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 또는 두공부(杜工部)이다.

 

그는 유비현덕이 최후를 맞았던 중경 근처 백제성(白帝城)에서 배를 타고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 등 삼협(三峽)을 지나 형양(衡陽)에 도착했으나 세상이 여전히 어지러웠다. 두보는 형양을 떠나 강릉(江陵), 공안(公安)을 거처 악주(岳州 =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에 이르러 얼마 동안 머물렀다. 이때에 <등악양루(登岳陽樓)>란 5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지었다.

 

昔聞洞庭湖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예로부터 동정호를 들어왔지만
이제야 그 악양루에 올랐도다
오와 초는 동남 녘에 뻗어 있고
하늘과 땅과는 밤낮으로 물 위에 떠 있구나

 

친척과 벗들은 편지 한 장 없고
늙고 병든 몸 외로운 배로 떠도는데
고향 산 북녘은 아직 전쟁터라
난간을 기대어 눈물만 흘리노라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이었던 두보는 인간의 심리나 현실적인 자연 가운데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시의 소재로 하였다. 두보의 시 중 장편으로 엮은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두보는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주로 각지를 유랑하며 이백, 고적 등과 가까이 지내며 자신의 견문과 시 세계를 넓혀갔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작은 관직을 얻었으나 대기근으로 이마저 내던지고 쓰촨성(四川省) 청두에 정착하여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우니 후세사람들이 이를 ‘완화초당’이라 불렀다.

54세에 청두를 떠나 장강을 따라 유랑생활을 계속하며 시작에 몰두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장강 동정호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 등도 전해온다.

 

그의 작품과 시풍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고려 시대부터 여러 권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시절의 《두시언해》를 비롯해 성종 때는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篡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유일한 두시전서(專書)이다.         

 

현대에 나온 번역서로는 이병주의 《두시언해비주》(1958)와 양상경의 《두시선》(1973) 등이 간행되었다.<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