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2군사령부 의무참모부에 부임하니 치과의학전문학교 출신이면서 일반의를 겸한 김(金) 모 대령이 부장(의무참모)이고, 치무과장은 같은 치전 후배인 정용래(鄭用來) 대령(경치전 13회)이었다. 같은 대령이지만 그 대우의 차이는 너무나 심하였다. 치무과장은 우선 차도 없어 대령이 도보로 출퇴근해야 했고 숙소도 물론 없다. 그것은 고사하고 딸린 식구들의 식량조차도 없다. 선배라는 의무참모는 예하부대에서 넉넉한 상납을 받으면서도 매정하게도 후배인 정 대령에게 전연 배려해 주는 것이 없었다. 나는 심지어 나의 불식미(不食米)를 보태면서 과장을 도와야 했다.
치과에는 예하부대(隸下部隊)가 없고 지휘관(指揮官)도 없어 재량권(裁量權)이 없으니 아무런 여유가 없다. 어데 가나 병원장 밑에 치과 부장이고 아니면 과장으로 참모직(參謀職)밖에 없다. 그러니 막말로 ‘국물’도 없다. 자연히 청백리(淸白吏)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옆에서 부정부패로 호화판을 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 먹고 살기 위해서보다도 유흥비 조달과 흥행에 탕진하는 판이니, 옆에서 보고 있는 치과군의관은 젊은 기질에 술김에 심술을 부려 보기도 하니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일부 부정한 사람의 이야기니 오해 없기 바란다).
모든 부정은 권한을 가진 자와 보급품을 취급하는 일부 부도덕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 의약품의 부정유출과 보급품의 부정처리, 착복, 징병신체검사의 부정판정, 부정입원과 의병제대, 그 모든 이면에는 금품이 뒷거래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부정이 이뤄진다.
치과는 팔아먹을 것도 없고 해 먹을 것이 없다. 약은 먹으면 소화되어 없어지지만, 금은 돈보다 귀하게 여겨 늘 검열의 대상이며, 화장터에 가도 남아야 한다. 입을 벌리면 다 들여다보이니 속일 것도 없고, 부정이란 있을 수가 없다.
우스운 소리지만 수의과 의사는 약품을 병 단위로 팔아먹어도 걸리지 않는 것이, 소나 말에게 먹었느냐고 물어봐야 대답을 못 하니 확인할 도리가 없고, 물어볼 수 없으니 증거가 남지 않아서 얼마든지 해 먹는다고 하였다.
징병신체검사장에는 부정이 판치게 마련이다. 검사장에서 손가락을 꼬부려 보이면서, “군의관님이요! 내는 이 손가락이 요래 꼬부라지질 않아 총을 쏠 수 없어 군대에 몽 가겠습니데이” 하면서 불합격을 애원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위층의 거절 못할 청탁도 있을 터이니 판정의 기준이 무너질 수밖에, 하는 김에 군의관도 같이 해 먹게 마련이다.
적반하장이라고 부정하고 도둑질하는 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며 잘난 체하고 날뛰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사전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짜고 해 먹으니, 걸리질 않으며 해도 같이 해 먹는다. 선 도둑이 걸리고 잔 도둑이 잡히게 마련이고 진짜 큰 도둑은 걸리지 않는 법인데, 다시 말하지만, 부정을 저지르는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아예 근처에 가지도 말고 거들떠보지도 말고 흉내도 내지 말자고 충고를 하며, 남이 부정을 저지르고 그릇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훗날을 바라보자고 위로 아닌 충고를 하였다. 그래서 예하부대 치과 군의관들이 매월 학술활동을 의무적으로 보고토록 하고 독려하였으며 이를 고과에 반영하여, 학술의 발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군사령부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업무지침도 없고 막연하였다. 부처 간의 협조공문 결재와 의뢰서가 전부였다. 내가 할 일을 만들어서 해야 했고 미국에서 보고 배운 대로 업무를 시작하려니 막연하였다. 군대조직대로 인사 정보 작전 교육 보급의 순으로 FM, TM 등 지침서를 뒤져가며 참모연구도 하였고, 적절한 인사가 첫째며, 예하부대의 현황을 파악하고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우리의 작전은 교육이다.’ 그리고 원활한 보급을 위해서 노력을 하였다.
미국에서 제일 부러운 것이 교육과 학술활동이었으며, 우리는 언제나 미국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앞서가기는 힘들어도 따라가기는 쉬운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위안을 받으며 일하였다. 이때 함께 고생한 사람은 지광원(池光源) 중위(서울치대 9회 서치회장)였으며 과장은 최형곤(崔亨坤) 대령(서울치대 1회), 그리고 나는 소령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군의학교에서의 치무행정교육(齒務行政敎育)에 이어 구강외과보수교육(口腔外科補修敎育)과 보철보수교육(補綴補修敎育) 그리고 보존보수교육(保存補修敎育)의 3개 분과학과 교육계획을 세워 실시하였다. 이것은 전후는 물론 해방 후 최초의 일이다.
보수교육은 비록 1주일간의 단기교육이었지만 모교의 교수님들도 초빙하고 개원의도 참가하여 공부할 기회를 마련하니, 군 민간의 친선은 물론 선후배 간의 유대와 정을 나누고 학술적인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공유할 기회를 만들고 공부하는 군대라는 인식을 군 내외로 심어주고, 1차 2차 횟수를 거듭할수록 아주 좋은 성과를 거두어 아주 유익하고 보람된 필수적이고 긴요한 교육이었다.
전방에서 후송된 악안면구강외과 환자는 제1 육군병원에 집결시켜 집중적인 진료를 하였다. 악안면구강외과 환자 수술에서 골이식(骨移植)과 피부이식(皮膚移植)을 하자면 환자의 신체 타 부위 조직을 채취해야 하므로 일반의와의 협진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는 성형외과 군의관이 없어 서울치대를 졸업하고 경북의대를 나와 양쪽 면허를 가진 이열희(李烈熙) 소령(서울치대 1회)을 발령하여 악안면구강외과 진료를 시작하였다.
대학이 5년이나 선배지만 군에 늦게 징집되어 계급이 낮은 정순경(鄭淳慶) 박사(경치전 14회)는 후배 이열희(李烈熙) 소령과 함께 근무하면서 치과의사면허만 가지고 있으므로 진료영역에 제한을 받으니, 후배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분발하여 만학(晩學)에 검정시험(檢定試驗)으로 일반의사 면허까지 받아서 근무한 대단한 분이었다. 그 선배가 한국 악안면구강외과(顎顔面口腔外科)의 선구자다(경희치대 교정학과 정(鄭)규림 교수의 선친(先親)이다).
1959년 대학에 앞서서 군에서 먼저 인턴 레지던트 교육을 하여, 총 95명이 수료하였다. 예편하겠다는 후배를 설득시켜 제1기 인턴 레지던트교육을 수료한 사람이 구강외과에 민병일(閔丙一) 교수고, 보철과에 박재중(朴裁仲) 장군이다. 군복무기간은 교육의 과정이었고 공부하는 기간이라고 해도 된다. 그래서 군진치과의학(軍陣齒科醫學)은 발전하였다.
한마디로 한국의 치과의학은 군대를 통해서 전수된 미국 치과의학에 따라 발전하였다.
대학에 앞서서 군에서 먼저 인턴 레지던트교육을 하였고, 그에 앞서서 분과별로 구강외과보수교육과 보철보수교육 보존보수교육을 하였으며, 미군 부대 OJT 실무교육과 진료시범교육 등으로 실질적인 진료 술식까지 전수하는 교육을 하였으며, 미군 38선 치과학회를 통한 한미학술교류는 한국 치과의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도미교육(渡美敎育)을 통해 미국의 치과의학을 직접 접할 수 있었으며, 미국군사원조계획의 하나로 많은 치과 군의관들이 대학에 앞서서 도미유학교육을 받아 1954년부터 1964년까지 10년간 35명의 치과 군의관이 초등군사반 2명을 비롯하여 구강외과 과정과 치과 보철과정, 구강 병리과정 그리고 3명이 치과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