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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아버지의 술, 치과의사 아들의 박카스

수필

오늘처럼 이렇게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전날 추수를 마치고 토방 위에 추수한 볏가마니들을 쌓아 놓고 비를 맞지 않게 방수포로 덮어두었던 날이다. 그날도 비가 온종일 주룩주룩 내렸다. 아버지와 나는 마루에 앉아 방수포 위에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앞에는 막걸리와 평소 술안주로 즐겨 드시는 문어 숙회가 놓여 있었다. 어린 아들은 술 드시는 아버지가 못마땅해 마지 못해 곁을 지켰다. 힘들었던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끝마쳤다는 후련한 표정이 불그죽죽한 아버지의 야윈 얼굴에 어려 있었다. 아버지는 술, 담배를 참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 영향인지 나는 술 한 잔에도 취기가 올라 온몸이 벌게지는, 알코올 분해효소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보기 힘든, 몸을 갖고 있다. 그래서 술 한 잔에 시름을 덜고 스트레스를 날리는 애주가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내게는 미적분만큼이나 어렵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내가 이렇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드리면서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하시다고 서둘러 가버리셨는지……”


오랜 친구의 넋두리를 듣자니, 아버지 생전에 건강에 해로우니 술, 담배 좀 그만하시라고 버릇없이 잔소리만 늘어놓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왜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가 술, 담배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유를 헤아려 볼 주변머리가 내겐 없었을까?’


아버지를 향한 미안한 마음에 그날따라 소주는 쓰디썼다.
치과에 종사한다는 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신경치료(근관치료)를 해야 할 때는 치아의 머리 기준점부터 뿌리 끝까지 밀리미터(mm) 단위로 길이를 측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40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안은 근관치료 도중에 순간순간 흐릿하고 답답하고 불편한 상황을 연출했다.


치과의사는 진료실 천정에 많은 조명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치과용 유닛 의자의 눈부신 LED 라이트 아래에서 짧게는 수분, 길게는 1시간 이상씩 집중해서 환자의 입안을 반복해서 들여다보며 진료하게 된다. 시력이 성할 리 없다.


“이 선생님~ 죄송한데 저 약국에서 타이레놀 좀 사다 주실래요.”
“최 선생님~ 죄송한데 저 박카스 두 상자만 사다 주세요.”


집중력 저하로 함께 일하는 동료 선생님들에게 일하다 말고 성급히 부탁하는 일이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노동 총량 불편의 법칙!”


사람마다 직업을 갖고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노동 총량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노동하는 시간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심지어 병들게 만든다. 내 경우엔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부담을 지우기도 하고, 매일 아침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질 않는다. 목과 등 주변의 근육들의 유연성을 떨어뜨리며 수시로 근육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돌아보니 쉬운 직업이란 없다. 아버지는 치과의사로 살아갈 내 삶이 마른자리라고 좋아하셨지만. 동료 치과의사 J와 이런 얘길 나눈 적이 있다.


“치과 일을 하다 보면 어떤 두려움이 있어. 내가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오늘 등골이 서늘해지는 상황을 맞닥뜨린 후에 다음부턴 조심해야지 마음먹었다가도 어느덧 똑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잠재적 두려움 말이야.”


우연히도, 아니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불안과 초조, 두려움 말이다.
환자를 봐야 하는데 집중력이 떨어지고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다. 몸은 피곤함을 안다. 그럴 땐 치과 일을 회피하고 환자를 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수십 가지 이유를 들어 치과에 오고 싶지 않았음에도 용기를 내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기는 환자를 돌봐야 한다.


내 몸이 힘들다는 이유로, 내 마음이 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박카스를 마신다. 어느 날은 두통이 있어, 또 다른 날은 몸에 근육통이 있어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진통제를 먹는다. 그래야만 환자를 볼 수 있으니까.


문제는 박카스와 진통제를 먹는 날의 주기가 짧아진다는 데 있다. 오후 서너 시쯤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에 일주일에 한두 번 마시던 박카스를 이제는 오후에 한 병씩 마시기를 몸은 원한다. 몸이 정말 힘들 때는 타이레놀에 박카스를 더불어 마셔야 하는 날도 있다. 그리고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내가 먹는 박카스와 타이레놀이 아버지가 마셨던 술과 담배와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 징용을 끌려갔다 오셨다. 해방되고 큰아버지가 있는 고향 함열에 정착하지 못하고 삶의 기반이 전혀 없으셨던 군산에 오셨다. 대농가의 일을 거들면서 모은 돈으로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병든 몸에 넉넉지 않은 경작지로 5명의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셨을 것이다. 옆집처럼 과감하게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땅을 늘려 가는 재기에 능하신 분도 아니셨다. 그나마 가지고 계신 땅을 지키기 위해 애쓰시다가 속절없이 땅을 팔아야 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버지가 느꼈을 절망감을 기억한다. 폐가 좋지 않으셔서 힘든 육체노동에 숨이 가빠지고 힘에 부치셨다.


아버지는 왜 술, 담배를 좋아하시게 됐나 생각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내가 먹는 박카스와 타이레놀이 아버지가 마셨던 술과 담배와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모든 육체적 노동행위들을 해내기 위해, 노쇠한 육체에 남아 있는 힘을 짜내기 위해서라도, 삶의 고통을 잠시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막걸리와 소주가 때로는 담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노동은 누구에게나 육체적, 정신적인 소모와 그 몸이 지닌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해야만 할 상황을 만들어낸다.

 

술과 담배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일하셨을 아버지의 고단한 삶과 가장으로서의 외로움을 나는 요즘 박카스와 타이레놀을 먹으며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먹게 될 타이레놀과 박카스의 양을 가늠해본다. 언제쯤이면 더는 박카스와 타이레놀이 내게 필요치 않을까?


노동 총량 불편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중에 아빠가 될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함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마시며 아버지를 위로해드리고 아들에게 위로받고 싶다. 오늘처럼 이렇게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