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저녁 8시 30분. 경기도 Y 치과 김 모 원장실엔 불빛이 환했다.
김 원장은 환자들과 온종일 씨름하느라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진료실에선 퇴근했지만 밀린 치과 행정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날 두 번째 출근을 했다. 책상 위엔 직원들이 퇴근하면서 시켜 주고 간 햄버거와 다 식어버린 커피 한 잔이 서류 더미들 사이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그에겐 일주일에 두어 번 치과에서 야근하면서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우는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개원 15년 차인 김 원장은 기자를 보자마자 “날이 갈수록 각종 치과 행정업무가 늘기만 하고 줄지는 않는 것 같다”며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날은 그동안 버텨왔던 비급여 진료비용 자료제출을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기한이 5일밖에 남지 않아 마음이 촉박했지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심평원에서 제작한 9분 6초짜리 안내 동영상을 검색해 시청한 후 차례대로 해봤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입력이 막힐 때마다 동영상을 다시 돌려 보길 수차례. 김 원장은 이날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자료제출을 겨우 끝내고 퇴근할 수 있었다. 그는 치과 문을 나서면서 “오늘은 이만하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부 각종 규제 정책 쏟아져
개원가가 과도한 행정업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치과의료기관의 행정 부담을 가중시키는 정부의 각종 정책이 날이 갈수록 늘면서 “진료보다 행정업무가 더 힘들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의원급 기관의 근무 인원과 시스템의 한계를 고려치 않은 과다한 행정업무 부담이 의료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를 높여 환자 진료에 전념할 수 없게끔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진료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치과의 대표적인 행정업무로는 매년 실시해야 하는 법정의무교육이 있다. ▲개인정보보호 교육 ▲성희롱 예방 교육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아동학대 신고의무자 교육 ▲긴급복지지원 신고의무자 교육 ▲결핵감염예방 교육 ▲산업안전보건교육(병원급) 등이 그것이다. 법정의무교육을 이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과태료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밖에 ▲진단용방사선 안전관리책임자 교육 ▲구강검진실무자 교육 ▲의료폐기물배출자 교육 등 각종 교육과 ▲보건의료자원(인력·시설·장비) 신고 ▲적출물처리자율 신고 등 각종 신고업무까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여기에다 진료 때마다 환자들에게 받아야 하는 서명 자료, 민간 치아보험 청구 서류 등 각종 자료 발급 업무, 최근 더해진 비급여 진료비용 정보 제출까지 해마다 진료 외 업무가 늘고 있지만 이마저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전에 개원 중인 이 모 원장은 “규모가 큰 병원급이야 행정 전담인력을 두면 되지만 직원이 한두 명 있는 치과의원급은 여력이 안 되다 보니 원장 혼자 진료를 하면서 각종 행정업무까지 처리해야 한다. 그나마 예전에는 일부 민감한 업무를 제외하고는 직원들과 나눠서 했지만, 요즘은 눈치가 보인다”고 토로했다.
그는 “젊은 치과위생사 직원에게 행정업무를 시켰더니 자기 직무 외 업무라며 볼멘소리를 하더라.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직원들은 칼퇴근을 하고 못다 한 업무는 결국 원장이 남아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내가 도대체 치과의사인지 행정직원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했다.
#자존감 진료의욕 하락
정부가 사회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각종 규제 정책을 양산해 관련 행정업무를 의료인들에게 떠넘기면서도 이로 인해 의료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기회비용과 피로도는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도 문제다.
서울에 개원 중인 박 모 원장은 “정부가 떠넘긴 일들을 처리하느라 양질의 진료를 위해 반드시 담보돼야 할 의료인의 자존감과 진료의욕은 한없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정부는 여전히 뒷짐만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원장은 “개인적으로는 지난 6월 말 개인정보보호자율점검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라며 “치과대학에서는 배우지도 않았던 수많은 행정업무와 이와 관련해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용어들,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수많은 일과 마주하면서 치과 운영에 대한 역량 자체를 의심하게 되더라. 심지어 치과를 접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고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