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치과대학생을 마무리하며

Relay Essay 제2470번째

처음 신문 기고를 부탁받았을 때, 나의 어떤 이야기가 치의신보를 구독하시는 분들께 읽을거리가 되고 귀감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영화, 여행 등 다양한 주제를 생각해보았지만 한 치과대학의 총대표로서 학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는 만큼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치과의사 선배님들께도, 아직 학생신분인 후배님들께도 읽을만한 글이 될 것 같아 ‘치과대학생을 마무리하며’ 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다. 나의 입학생 시절부터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의 평범하고, 평범하지 못했던 치과대학 학생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나는 예과출신으로 2016년도 전북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의료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적은 없지만, 그 당시에 많은 심정의 변화가 있어 치과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위 학년 선배들을 제외하고 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치전원) 세대였기 때문에 선배들과 10살, 많게는 15살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동아리에 가입하고 술자리를 가지며 연애, 과외도 하고 여행도 자주 갔다. 또, 지금 교수님들께서 보시면 분개하실 이야기이지만 F학점도 받으며 학사경고에 가까운 성적으로 예과를 마무리하였다.

 

본과에 올라오면서 정원 40명의 우리학교는 28명의 예과 입학생과 함께 4년을 재학할 편입생 동기들을 선발하였다. 모두 나보다 형, 누나들이었고 큰형은 나와 16살이 차이나는 언뜻보면 삼촌, 이모라 할 동기들이 생겼다. 원래 나는 낯을 가리지 않는터라 형, 누나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니, 나이가 어린 사람과의 대화가 훨씬 어려웠을 형, 누나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대화의 주제가 예과생들만 있었을 때보다 폭넓어졌으며, 같은 이야기를 해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해졌다. 나의 본과 1학년은 드디어 치과의사로서의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한다는 의미와 평소에 같이 생활하기 힘든 나이대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가지며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한 해였다.

 

본과 2학년으로 진급하며 과대표를 맡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반장 및 남들을 이끌어가는 일에 거부감이 없었던 나는 잘 할수 있다는 자신감 반, 나보다 형 누나들에게 잘 할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반으로 과대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일찍 등교하고, 주말에도 학교 및 병원에 나가며 일과시간 종료 후에도 학교에 남아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맡은 바 일이 있으면 철저히 착오없이 절대 다수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꼼수부리는 일 없이 성실하게 임하였다. 이렇게 나의 본과 2학년은 마무리되었다.

 

본과 3학년이 되며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전세계적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병원생활동안 예년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저 수업을 듣고 모형에 실습하던 2학년과 달리 3학년부터는 직접 환자를 대면하며 조금은 더 치과의사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하루종일 병원에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피로 또한 상당했지만 금새 익숙해졌다.

 

3학년 2학기 시작할즈음, 총대표 선출이 가까워졌다. 위 학년 선배 총대표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나는 2학년때의 경험과 동기들의 응원속에서 총대표라는 무거운 자리를 맡게 되었다. 예과생때는 악명높게만 들렸던, 본과 1, 2학년때는 한없이 대단해보이던 총대표라는 직책을 내가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무서움도 컸지만 동기들의 응원속에 총대단을 꾸리고 총대표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말을 가지지 못하고 평일에도 퇴근할 수 없는 삶을 처음 살아보았다.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조금은 했었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순간들은 후배들과의 마찰로 인해 이슈화되었을 때, 교수님들과의 불화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 등등 셀수없이 많았다. 실기시험이 처음 시행되는 해인지라 인수인계라는 것이 있을리 없었고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계속 되었다. 다행히 9월에 치뤄진 첫 실기 ‘나’형 시험은 예상보다는 좋은 결과를 낸 것 같아 이제야 1/3의 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병원생활을 겸하며 11월에 예정된 ‘가’형 시험과 1월 예정인 필기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나만큼이나 동기들 또한 그런 불안감과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을 알기에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여 동기들에게 알리고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라는 말이나 ‘머리로 애낳는 느낌’ 이라는 말을 예술하는 친구들에게 들었었는데, 치의학 역시 art and science라서 그런지 예술하는 친구들이 하는말을 나또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은 전국 모든 치과대학의 총대표 중 가장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총대표 중 가장 동기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행복한 총대표라는 자부심이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으며, 곧 예정되어 있는 남은 두 번의 국가고시를 위해 앞으로도 철저하게, 실수없이 일을 수행할 것이다.

 

처음 대표직을 맡았을 때에는 무엇인가 큰 변화를 일으켜 혁신을 만드는 것이 훌륭한 대표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표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게 물 흐르듯 잘 마무리하는 것이 더 좋은 덕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무뎌진 것인지, 현실적인 것과 타협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은 졸업을 하며 내 대표직이 끝났을 때에 다른 동기들에 의해 평가될 것이며 내 자신의 만족 정도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국 본과 4학년 여러분 모두 국가고시 합격하시고, 선배님들께는 과거 추억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며 후배님들께는 앞으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