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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자리와 난 자리

스펙트럼

“일곱 번 남았어요, 선생님.” 접수대 앞을 지나치는 제게 직원 한 명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넵니다. “OOO 선생님 턴 끝나는 날까지 진료일로 7번 남았어요.” 씁쓸한 표정으로 이어진 설명에, 생각이 더해집니다.

 

저희 진료실은 대학병원 특성상 인턴, 파견 레지던트, 치과대학 원내생, 치위생학과 실습생 등 잠시 거쳐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전공의인 제가 이들에게 어떤 역할이든 부여하고 이것저것 최대한 해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조하는 직원들의 노력은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 의무 없는 일을 묵묵히 지켜온 직원들이, 때로 무척이나 누군가의 종료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자리가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듣자니, 충분히 힘들었을 만한 사연이 쏟아집니다. 이렇게까지 다양하고도 심각한 사연들을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한마디 보태자 돌아오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처음에는, 환자 앞에서는, 교수님과 제 앞에서는 전혀 딴판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 듭니다. 부족한 역량이나마 모두를 배려하고자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리 말하기 편한 전공의 입장에라도 이렇게까지 민원을 들어야만 하는지, 그렇다고 제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혹여 누군가 다른 자리에서 저를 두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까 겁도 났습니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보통 빈 자리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티가 나지 않고 자리에 있던 사람이 나가면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하여, 지금 자리에 있는 사람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경우와 같이, 오히려 자리가 비워지기만을 기다려서, 난 자리를 너무나 기쁘고도 명확하게 알게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지금껏 제가 경험한 것 중 머물다 간 자리에 진한, 좋은 여운을 남기는 사람을 몇 떠올려 보자면, 단순히 업무 역량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보듬을 줄 알았던 특징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업무 역량도 뛰어났지만 그 따뜻한 마음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권위, 물질, 지식 등 그가 가진 것을 막론하고 상대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릴 수 있는, 그래서 그 자리가 날 때에 업무의 마비를 우려하기보다 마음 한 켠이 비는 듯한 느낌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전공의 2년차의 가을을 지나는 제 자리 역시 언젠가 비워질 텐데, 난 자리가 어떤 여운을 남기게 될지 벌써부터 고민이 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소속되었던 곳에서 저의 빈 자리는 업무적으로 공백이 느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인수인계를 잘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떤 회사에서는 제가 퇴사한 지 1년도 더 지나 폐업을 하는데도 업무를 도와달라 연락이 올 정도로 어쨌거나 제 공백은 업무 공백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금 달라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진료도 잘 보고 업무도 잘 했지만, 그보다 마음이 따뜻해서 환자들에게 또 동료들에게 그 마음을 감싸주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너무 큰 욕심이라면 진료도 업무도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만은 감싸주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말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