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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5>

소설

명성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민혁은 순영의 부모님과 저녁 식사가 약속 돼 있었다. 라운지 안에는 제이슨 므라즈의 이란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창가 자리였다. 마천루들 사이로 정체된 차들의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 알전구들처럼 보였다. 순영은 이번이 아버지를 설득시킬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오빠, 오늘은 아빠 마음에 꼭 들게 말해야 해.”
순영이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호텔의 입구 쪽에서 순영의 부모님 두 분이 걸어 들어왔다. 민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넙죽 인사를 했다.


“두 분 오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야경이 멋진 창가 자리로 예약해두었습니다.”
순영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민혁은 라운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순영은 민혁을 놀라게 해주려고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잘 지내지? 결혼? 응 조만간 할 거 같은데. 장인 되실 분이 보건소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개원하라고 성화셔서 말이야. 데릴사위? 말도 안 되지. 우리 어머니는 어쩌고. 보건소를 그만두긴, 지금 개원환경이 얼마나 안 좋은지 뻔히 아는데. 제주도에 내려가서 개원하는 척하면서 일단 결혼하면, 순영이든 순영이 부모님이든 어쩌겠어. 일단 결혼만 하면 개원은 빠이빠이야.”


순영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언제 온 거야. 기척도 없이?”
순영이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민혁이 웃으면서 순영의 뺨을 어루만지려 손을 뻗자 순영이 몸을 움찔하면서 외면했다.


“왜 그래? 또!”
민혁이 소파에서 몸을 들썩거렸다.
“오빠가 한 말 다 들었어. 나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민혁은 화가 난 순영을 바래다주기 위해 그녀의 집 근처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우린 둘 다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순영이 차에서 내리면서 민혁에게 말했다. 바람이 도로 위를 스칠 때마다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민혁은 청량리역에서 순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백두대간 관광열차를 타고 여행하기로 했다. 기차역 대기실에 많은 사람이 TV 앞에 몰려 있었다. 속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TV 화면에 박 교수에게 C타입 칩을 심은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한국 선박을 인질로 잡았던 소말리아 해적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총상을 입은 해적 한 명을 해군헬기로 후송하여 우리 의료진으로부터 수술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말을 멈춘 대변인이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머리가 가려운지 심하게 긁어댔다.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혀를 전후좌우로 날렵하게 움직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해적이긴 하나 그도 엄연히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자이다. 의료진은 수술받는 동안 당시 총격으로 인한 외상과 전혀 무관한 몸 안의 기생충과 내장의 분변, 위장의 옥수수가 들어 있었다고 언론에 보도되도록 해서 환자에게 인격테러를 가하고 의료법을 심각하게 위반했다.”


대변인의 브리핑을 듣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혀를 끌끌 차거나 욕을 해대는 소리가 들렸다.
“소말리아까지 날아가 힘들게 수술해서 목숨을 살려줬고만…….”


연구실에서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을 지켜보던 박 교수는 대변인의 혀에 이식한 C타입 칩이 부작용을 일으켰음을 직감했다. 불똥이 그에게 튈 게 뻔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 내일 아침 필리핀으로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항공편을 예약했다. 박 교수는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청와대 브리핑 사고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금요일 아침이었다. 출근을 서두르는 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001로 시작되는 국제전화였다.


“여보세요?”
“나 박 교수일세. 이제 좀 대한민국이 잠잠해졌나? 달변가로 만들어 줬으면 됐지. 그런 소소한 부작용 가지고 저 난리라니…… .”
“아직 브리핑 사건으로 어수선합니다.”
“나는 연구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자네도 잘 알잖는가.”
“……”


“앞으로 자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걸세. 이곳에 와서 나를 좀 도와주게. 내 특급대우를 약속하지.”
“홀어머니가 계셔서요.”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 생각해보게. 그럼.”
끊겼다고 생각한 수화기 너머에서 박 교수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혀에 중독돼서 지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 주제에…….”

 

사람의 입안 아래쪽에는 혀라는 길고 둥근 살덩어리가 살고 있다.

 

<끝>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