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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지심(首丘之心)

배광식 칼럼

40대에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2년간 살았다. 오레곤건강과학대학교(Oregon Health Sciences University)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아들이 고2, 중1인 때라서 자녀의 학업문제로 혼자 갈지, 가족과 함께 갈지를 결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항상 사표(師表)가 되는 존경하는 분께 상의하니, ‘가족은 함께 지내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단말입니다.’라는 조언에 크게 공감되어 대입이 곧 다가올 아이와 함께 떠난 것이었다.

 

조언해주셨던 대로, 요즈음도 가족이 함께 모이는 때면 심심치 않게 포틀랜드에 살던 때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곤 한다.

 

내 또래들이 70년대에 이민을 많이 갔다. 고교 및 대학 동창들이 포틀랜드를 비롯해 미국에 여럿이 자리잡고 있었다. 2년 지내는 동안 이민 온 동창들을 만나보면 나름 성공한 삶인데도 노년 들어서는 고국에 가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인 경우가 많았다. 여우같은 짐승도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동혈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수구지심(首丘之心)이 있는데, 사람으로서야 어련하겠는가?

 

당시 여름 휴가철에 엘에이(LA)에 사는 고교동창에게 놀러가서, 함께 태평양 바닷가에 바람쐬러나간 적이 있다. 동창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 ‘이 바다 저쪽으로 한없이 걸어가면 한국이 나온다.’라고 하였다. 짧은 표현이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도 30년이 가까워오는 추억이 되었고, 그 동창들은 여전히 미국에 살고 있다.

 

고2~3을 미국에서 보낸 큰 아이는 미국 대학을 나올 수밖에 없었고, 치과대학을 나와 치주과 전문의가 되었다. 해마다 한 번씩 손자들을 보러 들르곤 하였는데, 코로나로 2~3년 못 와본 사이에 어렸던 손자 둘이 초등생이 되었다. 샌 디에고에 잠깐 다니러 와서 초등생 손자들까지 3대가 자주 가는 산책로는 집 근처 ‘토리파인 주 자연보존지역(Torrey Pines State Natural Reserve, https://www.parks.ca.gov/?page_id=657)’의 트레일 코스이다. 멀리서 보면 병풍 두른 듯한 그리 높지 않은 바닷가 야산인데, 제법 코스가 다양하고, 산과 해변 백사장 모두를 걸을 수 있는 곳이다. 토리파인이라는 이곳에만 있는 소나무종은 솔잎이 길고, 솔방울이 큰 독특한 생김새이다. 약 200만평이 넘는 이곳에 특징적인 토리파인 외에 300여종의 식물군이 있고, 해안 절벽은 브라이스 캐년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곳이 난개발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데는 엘렌 브라우닝 스크립스(Ellen Browning Scripps, 1836-1932) 여사의 헌신이 숨어있다. 엘렌 여사는 영국에서 7세에 부친을 따라 미국 일리노이주에 이민 와서, 여성 대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인 1858년 대학을 졸업했고, 잠깐 교직생활을 하였다. 오빠가 디트로이트 석간신문을 창간하자 저널리스트로 교정보는 일과 1면 컬럼 쓰는 일을 시작해, 여성참정권 실현 등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인 1932년에는 매일 전국 약 1,000여개의 신문에 컬럼이 실릴 정도였다. 저널리스트로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여사는 1896년 샌 디에고 북서쪽 라호야(La Jolla)로 이사해, 그의 많은 재산을 라호야, 샌 디에고 및 남부 캘리포니아 등의 여러 후원하는 일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곧 인생 후반기에, 따뜻하고 통찰력 있는 영혼을 가진 그녀는 자연, 의학,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일뿐 아니라 그녀의 지성을 자극하는 프로젝트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예로 스크립스 기념병원, 스크립스 해양연구소, 초중등고교 및 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선물은, 어떤 면에서든, 조금 더 살기 좋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라는 모토대로, 엘렌 여사는 미래세대에게 희귀하고 독특한 토리파인을 물려줄 수 있게 바닷가 황무지를 사들여 영구 비개발 지역 지정의 조건을 달아 주정부에 기부하고, ‘토리파인 주 자연보존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은 다닥다닥한 주택가가 되었을 것이다. 플로리다 대학에 1개월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 바다로 숨는 저녁 해를 보려다 바닷가가 모두 개인주택으로 열지어 막혀져 있어 바다에 근접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드넓은 미국땅인데도 이런 곳이 있는 것과 대비하면, 이곳 자연보존지역은 밤이고 낮이고 24시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는 천혜의 축복받은 지역인 셈이다.

 

또 샌 디에고의 관광명소인 발보아 파크(Balboa Park)도 그녀의 사려깊은 후원금 덕에 가능했고, 그 입구의 종탑과 15분마다 발보아파크에 울려 퍼지는 우아한 종악 소리도 그녀 덕이다. 샌 디에고 동물원의 세계최대의 새장도 그녀의 기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 피난가서 살았던 외가 동네의 하얀 신작로와 싱그러운 아침 안개를 헤치며 논 물꼬 살피러가는 외삼촌 뒤를 따라 나섰던 기억을 떠올리듯, 손자들은 커서 아침 안개 속에 3대가 걸었던 토리파인 구역의 산책길과 파도소리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을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웃집 다니듯 우주여행을 다니는 시대가 되면, 다른 행성에 여행도 하고 이민도 갈 것이다. 그런 때가 되면 지구가 그리워지고 지구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될 것이다. 후손들을 위해 황폐하지 않고 환경보존이 잘된 그리워할만한 지구를 남겨줄 필요가 있다.

 

토리파인 구역을 영구개발금지시켜 후손들이 자연을 접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배려한 엘렌 여사의 혜안과 인간애에 감사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