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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을 “착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면, 의료윤리는 쓸모없는 것 아닌가요?

의료윤리학자에게 물어본다 (48)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의료윤리라는 분야가 의료인들이 착하게 행동하도록 이끄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재하는 내용을 보면 의료윤리는 그런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의료 상황에서 모두에게 적절한 원칙을 세우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 의료윤리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의료윤리가 의미 있으려면 학생들과 의료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익명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요. 딱히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법이 없어도 그 행동이 선하고 바른 사람을 의미하는 관용 표현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법’을 통한 제약이 있어야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려 한다는 의미가 될 겁니다. 의사, 치과의사라고 예외는 아니겠지요.

 

윤리라고 하면, 그런 외적인 강제 없이도 바람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학문 또는 분야라고 많은 분께서 생각하실 겁니다. 즉,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을 만드는 학문이 윤리라면, 의료윤리라는 분야는 주로 대학생과 의료인을 가르쳐 자연스럽게 옳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 윤리 이론의 주류를 이루는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자연스러운 행동 유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이론은 선하고 옳은 법칙이 무엇인지 판명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발전시켜 왔어요. 간단히 말하면, 의무론은 어떤 법칙을 모든 사람이 따를 때, 그런 세상이 바랄 만한 세상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런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공리주의는 유명한 표현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계산하여 이를 달성하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둘 다 어떤 법칙을 따를지, 또는 어떤 행동이 좋은지를 따지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이 이론을 배운다고 하여 그 사람에게 옳은 일을 하는 ‘성향’이 생기지는 않지요.

 

여기에서 많은 분이 의아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의료인에게 바른 성향을 부여하지 못하는 의료윤리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것이죠. 대학에서 의료윤리를 가르치고 윤리 보수교육을 시행하는 이유는 의료인에게 좋은 성품을 배양하여, 말마따나 “법 없이도” 알아서 잘하는 사람들로 성장하게 하려는 것 아니냐, 그렇지 않다면 의료윤리 교육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힐난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비판에 답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품을 통해 윤리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윤리적 난제를 풀어나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덕윤리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윤리적 문제를 다룹니다. 덕윤리 이론은 윤리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어떤 행동이 좋고 옳은지를 따지는 대신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사람(“덕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은 다음, 그 사람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덕 있는 사람은 동양 전통(“군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탓에, 한국에서 이 이론이 소개되었던 90년대 이후 윤리학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의료윤리에선 덕윤리는 한계가 있는 접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것으로 덕의 상대성과 의료 행위의 복잡성을 듭니다. “덕”은 보통 특정 문화와 사회에서 정해집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선 “공손함”이 많은 경우 덕으로 인정받겠지요. 하지만, 미국과 같은 직설적 문화에선 그것을 덕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의료 행위는 현대 과학기술과 함께 상당히 보편적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물론 각 나라의 의료는 여러 측면, 특히 그 문화와 제도에서 상이합니다만, 한편 비슷한 표준과 행동 방식을 따라갑니다. 우리나라의 치과 치료와 외국의 치과 치료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치과 치료의 “덕” 또한 비슷해야 합니다. 하지만, 각 나라의 덕은 (심지어 의료나 치과의료에서도) 다르지요. 이것이 의료윤리의 설명력과 행동의 접근성을 약화하는 문제를 지닙니다.

 

또, 의료 행위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의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도, 환자 없이 의료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른 여러 행위자들, 가족, 간호사, 약사, 의료기사, 공무원, 더 넓게는 대중까지 의료 행위에 영향을 미칩니다. 덕윤리는 특성상 “덕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데, 의사가 덕스럽게 행동했다고 해도 다른 행위자나 조건이 그것을 받아 줄 상황이 아니라면 그 행동이 좋고 옳은 행동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윤리적 문제를 직접 경험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가상’으로 경험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제 딸이 듣는 이야기는 그것이 전래동화든, 위인전이든, 창작동화든 어떤 어려움을 마주한 주인공이 그것을 좋고 옳은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때, 적절한 결말에 도달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아이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주로 감정 이입의 방식으로)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 속에서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꼭 어린아이에게서만 일어나지 않지요. 사회 문제, 특히 차별이나 착취와 같은 부정의를 주제로 한 소설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독자가 등장인물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소설 속에서 그 해결을 경험하면서 현실에서도 부정의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거예요. 역사적으로도 여러 소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해 왔지요. 노예 해방 운동을 촉발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작품이 좋은 예일 겁니다.

 

이야기를 통해 윤리적 어려움을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을 서사윤리라고 부릅니다. 비록 학부에선 시간이 없어 학생들과 같이하지 못하지만, 제가 대학원 수업이나 여러 글에서 사람들에게 소설이나 영화를 소개하고 그 안에 등장하는 윤리적 문제를 같이 검토해 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윤리적 문제를 구체적인 맥락에서 조명하는 것뿐만 아니라(구체적인 해설이라면 역사적 접근이나 법적 접근이 더 중요하겠지요), 그것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체험하고 청자 또한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같이 풀어보도록 초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런 방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훈련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한 시간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강의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직접 작품도 보고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숙련된’ 진행자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그러나, 적어도 제겐 “쓸모 있는” 윤리적 접근법이 하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지요.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