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전에 ‘10년 후의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10년 뒤에 저와 제 주변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길 바라는지 쓴 내용이었습니다. 아직 그때로부터 8년이 남았는데,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칼럼은 과거의 20대의 저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처음에 10년전의 나에게 쓰는 편지로 하다가 이십대의 과거로 바꿔보았습니다. 40대가 되니 새로운 자극이 이전보다 적기에 시간이 빨리 가고 재미를 덜 느끼지만 불안감은 덜해지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보다 현재에 더 충실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업무의 데드라인도 존재하고 건강이나 수면도 신경써야 하지만 당장의 일 또는 재밌는 만남에서도 불안감을 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십대 때 저는 많이 불안했었습니다. 82년 생이니 2001년부터 대학생이었는데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꿈도 컸지만 동시에 그 꿈을 이루겠다는 강박이 저를 많이도 불안하게 한 것 같습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뭔가 편안해 보이는데 저는 뭔가 불안한 압박감을 자주 느끼며 생활하였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치전원을 준비할 때도 그랬고 입학해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해서 수련을 받을 때도 30대 중반까지 꽤 자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전의 선택은 옳았을까? 완벽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중압감이었습니다. 이만하면 만족한다는 행복한 느낌보다 부족하고 더 성취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지배하였습니다. 뇌리 속에 인생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자주 했었습니다.
지금은 이만하면 다행이다 괜찮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서 옛날의 저를 떠올려 봅니다. 그럴 때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꽤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교수님이 본인은 젊은 시절의 나를 보면 어색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뭔가 철없고 불안감을 느끼는 과거의 저를 제가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어색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때 불안감을 느끼며 열심히 살아준 제가 있었기에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2년 초에 쓴 ‘멀티버스의 나에게’라는 칼럼에서 무수히 많은 선택의 결과 내가 지금 여기 있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특히 제 자식은 그 선택들의 최종적인 산물이며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한 선택이 완벽한지 안한지는 중요하지 않고 필연적인 우연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 과거를 보면서 당시 했었던 선택들을 반추하곤 합니다. 그 선택은 잘한 결정이었을까. 그 때 다른 선택을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들을 가끔은 합니다. 10년 전 당시에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부동산은 가장 쌌고 집값의 90%를 대출을 해주었기에 그때 과감하게 집을 살 수도 있었으나 미래가 불안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비트코인도 그때 존재는 알았으나 이전에 몇십 원 하던것이 많이 올라서 십만 원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절대 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수천만 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내리는 선택은 나름 합리적이고 최선이라 생각하며 결정을 내리지만 완벽한 선택은 될 수 없었다는 경험은 계속 과거를 반추하면서 살아갑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우연과 같은 것이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인연은 긍정적인 필연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치전원에 진학할 당시 공직이 꿈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공직에 있고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고 삶을 긍정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저를 만나면 말하고 싶습니다. 그때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없었어도 괜찮다고 말입니다. 과거의 불완전한 선택과 우연이 지금의 저와 저의 인간관계를 만들고 그것을 긍정할 때 다시 이는 지금의 저에게 완벽할 수는 없지만 나은 미래의 저와 연결시켜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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