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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원당

이미연 칼럼

오래전 어느 설탕회사의 설립 초기에 있었던 일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어렵게 사업허가를 받고 차관을 얻어 기계를 사고 기술도입계약을 맺어 공장을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대망의 시운전을 하는데, 기계에서는 나와야 할 설탕이 아닌 원당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다. 몇 번을 다시 기계를 돌려봐도 똑같았다. 공정을 점검하고 기계를 뜯어봐도 문제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차에, 지나가던 현장의 다른 직원이 무심하게 던진 ‘원료를 왜 저렇게 많이 넣지?’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고 한다. 욕심이 지나쳐 생산설비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는 원료를 들이부은 탓에 제대로 완성품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다시 기계와 매뉴얼을 확인하고 적정량의 원료를 넣자 비로소 새하얀 설탕이 제대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설탕이 귀한 대접을 받던 오래전 이야기건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첫째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공로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닐터이다.  국내 최초로 도입된 기계 조작에 능숙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몇달이나 여러 사람이 매달려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을 보면 기술지원을 받을 곳도 전문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직원이 원료 투입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부분을 짚어낼 수 있는 것은 현장의 경험, 소위 ‘짬’의 영역이다. 직접 일을 해본 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일이 돌아가는 흐름에 대한 통찰이다. 결정권자가 자신의 직책이나 입장만 고집하며 직원의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았다면 순조롭게 설탕 생산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현장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책상물림의 독선은 결코 필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둘째는 정해진 프로세스와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계든지 처리할 수 있는 한계용량이 있다. 원료만 많이 넣는다고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는다.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부산물이 많아지거나 기계가 고장날 뿐이다. 다같이 빨리 이동하고 싶다고 하여 엘리베이터 하나에 정원을 초과해 여러사람이 타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똑같다. 엘리베이터가 닫히지 않아 도리어 시간이 늦어지고, 차라리 차근차근 순서를 지켜 이동하는 것만 못하게 되기 십상이다. 


마지막으로는 지키지 못한 가치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원당이 몸에 더 좋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은 기계에서 최초의 국산 정제 설탕이 쏟아지는 순간의 감격에 동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제(精製)라는 말은 사전을 찾아보면 물질에 섞인 불순물을 없애 그 물질을 더 순수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정제되고 정련된 것은 품질이나 물성이 개선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즘은 정제당분이나 정제탄수화물의 ‘정제‘란 단어는 언중에게 부정적인 낙인을 얻은 것 같다. 설탕이 더 이상 귀한 단맛의 대명사가 아니라 건강의 주적으로 지탄받는 것은 설탕이 곱게 정제되어 순도가 높은 탓이 아니라, 흔하다고 너무 많이 먹은 우리 탓일텐데 말이다.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에서 의대정원 2000명의 즉각 증가를 주장하며 촉발된 대치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일부 국민들은 의료인 집단을 막무가내로 매도하기 급급하며, 직업 전망을 어둡게 보고 사직을 결심했던 의과 전공의들은 선을 넘은 비난에 낙심해 영영 길을 떠날 것 같아 보인다. 정녕 의료인은 공공재료이니 많이 밀어넣으면 보건의료성과가 좋아질 것이라고 정부당국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계신지 의심스럽고, 지금의 숙련된 의료진 대신 비숙련된 비전문가가 많아지면 국민건강이 증진될 것이라고 국민들이 진심으로 믿고 계신지 미심쩍다. 절망하고 낙심한 이들이 장차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살아나갈 자녀뻘 세대이며, 다가오는 노령화 사회를 떠받쳐야 할 이들이기에 마음이 더 무겁다. 우리 젊은 치과의사들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미 내 코가 석자라고는 해도, 우리 협회와 선배들이 다음 세대의 부담을 덜어주고 지속가능한 치과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민할 때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