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억력이 좋지 못해 바보인가 싶었습니다.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이야기에 잘 낄 수도 없었고 한 번 한 이야기를 또 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가 낯설기도 했습니다. 망각하면 바보가 되기 쉽습니다. 망각하면 반복하게 됩니다. 망각하면 불편합니다.
하지만 망각은 능력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행운이기도 합니다. 망각은 부활입니다. 잊어버리면 세상이 늘 새로워 집니다. 저는 기억력이 좋지 못해 엉덩이로 공부했습니다. 다소 멍청하게, 반복해서 또 하나하나 써 가면서 공부했습니다. 스스로 한탄하며 공부했고 남들 두 배, 세 배 시간을 들였습니다. 꾸준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바보는 지금도 늘 공부 중입니다. 하지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매순간 새롭게 태어납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있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노래 중에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나 싶었습니다. 대학에 와서 보니 별명이 ‘제록스’라는 선배가 계셨습니다. 제록스는 복사기 회사 이름이었고 그 선배는 암기의 천재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더군요. 풍문에 의하면 한 번 보면 머릿 속에 복사시키듯 그냥 바로 암기가 끝난다고 했습니다. 아, 세상엔 정말 기억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과거 동창생들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부담스럽습니다. 그 친구들은 어찌 그리 시시콜콜한 옛 이야기들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까요.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재미가 있다가도 막상 나 스스로 생각나는 일은 별로 없다는 사실에 혼자 놀라곤 합니다. 몇몇 단편적인 기억들만 머릿속을 맴돌 뿐입니다.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정신 승리를 해봅니다 - 나는 오롯이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다만 현재를 살 뿐이며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현재에 발을 딛고 미래를 향해 나 자신을 ‘기투’(企投)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성장, 발전, 지속 등 건설적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지금, 오늘’을 살고 있을 따름이라고 말입니다! 바라건데 다만 정신승리에 그치지만 않기를…
머리 좋은 사람은 편리하기도 하겠지만 괴롭기도 할 일입니다. 좋은 기억도 있겠지만, 안 좋은 기억들도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안 좋은 기억들조차도 하나하나 세세하게 모두 다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일 것인지요. 그러한 괴로움은 상당한 번민으로 다가올듯 싶습니다. 잘 되어 성공한 수백, 수천 증례가 있어도 잘 안되고 실패한 한 증례 때문에 잠 못 드는 것은 바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과거에 잘 했던 일도 잊어버리고 못 했던 일도 잊어버립니다. 좋았던 일도 다 잊어버리고 안 좋았던 일들도 모두 잊어버립니다. 원해서 기억하고 원하지 않아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원해도 기억할 수 없고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잊혀집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추억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과거 기억으로 그다지 슬프고 괴로워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이런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행여 남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피해를 주지 않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을 뿐입니 다. 소위 나쁜 업, 불필요한 업을 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 뿐입니다. 자칫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못된 인간으로 비춰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진료, 안전한 수술만을 지향하는 것은 제가 바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보 나름의 책임감입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듯, 수술 전 최악의 상황까지 환자에게 두 번, 세 번 분명하게 고지하고 이 내용을 동의서에 분명하게 사인을 받은 후 수술에 들어가는 것 역시 바보의 책임감입니다.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지만 하루하루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됩니다.
제가 기록에 남달리 열심(熱心)인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좋았던 기억, 기억하고 싶은 기억을 붙잡아 보자. 가뭇없이 흩어져 버린 생각들의 흔적을 남겨보자. 더 큰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작은 생각의 파편들을 기록으로 남겨보자. 이런 저런 생각들과 경험을 스스로 기억하고 또 공유하여 함께 나눠보자. 바보가 매일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대략 이렇습니다.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과거처럼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담스럽습니다. 할 이야기도 별로 없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바보가 되고 또는 무심한 사람이 되고 말 뿐입니다.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힘을 받습니다. 할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그들과 함께라면 아직도 청춘이고 앞으로도 계속 청춘일 것 같습니다. 바보라서 행복합니다. 어디 나 같은 바보, 또 없습니까?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