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2세기 말에서 13세기는 무인정권(1170-1270)과 4차례의 몽골침입으로 온 국토가 오탁악세(五濁惡世)와 도탄지경(塗炭地境)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를 항몽(抗夢) 호국(護國) 호왕(護王) 호불(護佛)하고,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하여 해탈열반(解脫涅槃)과 왕생정토(往生淨土), 성불(成佛)하는 방법을 찾는 전남 지역에 두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보조지눌(1158-1210)과 진각혜심(1178-1234)이 주도한 조계종 수선결사(修禪結社)는 출가자로서 상근기의 학승고승들이 모여서 화두(話頭)와 참선(參禪)을 통한 자력본원(自力本願) 자력신앙을 추구했다. 문수보살의 지혜와 화엄경의 일체심조(一切心造)를 지향하여 돈오정혜(頓悟定慧) 시심시불(是心是佛)로서 상구보리를 추구하였고, 조탑(造塔)보다는 유심(唯心)깨우침이 소중했다. 선원사에서는 소실된 부인사 초조대장경판을 재건하여 불심으로 항몽국책사업인 재조대장경사업(팔만대장경, 1236-1252년)을 주도했다.
또 하나의 집단은 백련사(만덕사)를 중심으로 한 원묘요세(1163-1245)와 진정천책(1206~ )이 주도한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는 중하근기의 범부중생(凡夫衆生)과 재가자들이 참회(懺悔)와 염불(念佛)을 통한 타력본원(他力本願) 타력신앙에 의지했다. 행동제일 보현보살의 자비와 실천행, 법화경에 의거한 조탑(造塔), 경탑(經塔)신앙을 받들었다. 부처의 말씀이 경전(經典)이 되고 경탑(經塔)이 된다. 조탑. 경탑공덕과 염불행선(念佛行禪)이 범부중생을 포용하는 범부선(凡夫禪)이며, 부처의 말씀과 가르침을 대신하는 문자와 경전 자체를 법신기명(法身氣命)으로 여겼고, 불법을 대신하는 경탑이 소중했으므로 다탑(多塔)신앙이었다.
백련결사 신도들에게는 경탑(經塔). 조탑(造塔)이야말로 부처말씀과 가르침이 화체된 경전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최선의 공덕이었다.
그러면 백련결사의 행법도량과 재가신도 총체적인 행법도량으로 집단적인 모든 것을 수행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1216년 만덕사(백련사의 본사) 준공 (1211년~1216년)
1231년 1차몽골침입. 항몽으로 만덕사는 수행도량이 필요.
1232년 4월 운주사대사 명의의 보현도량 기시소 공표. 도량초시 임진년 7월 고려 조정 강화도 천도. 8월 몽골2차 침입. 초조대장경소실.
1235년 3차몽골 침입(~1239)
1236년 송광사 수선결사, 만덕사 백년결사문 공표. 법화경1천부 시판.
1237년 담양 이연년 형제 난을 진압하는데, 요세는 관군 김경손 지지. 나주 운곡사 법화경대회 요세 참석,요세 선사 승계.
1238년 황룡사 9층탑소실(이 후 운주사 9층탑을 기탑(起塔)대처 추정)
1241년 천책의 법화도량소法華道場疏 결집공표.
1244년 갑진년다보탑경찬소甲辰年多寶塔慶讚疏.천책 낙성현장 목격.
1245년 요세 열반(원묘국사 비명병서).
1247년 4차 몽골침입(~1249)
1248년 천책 백년결사 4세 주법
1252년 재조대장경(1236-1252년.81,258장 5200만자) 낙성경찬.
1258년 최씨 무신정권 붕괴. 무오정변
1270년 몽골에 최종 항복. 고려 조정 개경 환도, 미친 개로 불리던 삼별초군 ‘탐진현 백련사’ 침탈. 온 국토가 친(親)몽골화로 백련결사 행법도량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상실과 정치 사회적인 사각지대로 방치되어 역사에서 사라져 왔다.
호산록(湖山錄)은 진정국사 천책의 시문집으로서 천책은 과거 급제자이며, 1228년 만덕사에서 출가했다. 훗날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은 천책을 최치원, 이규보와 더불어 신라 고려의 3대 시인으로 칭송했다 한다. 운주사 현장 불사를 주도한 인물로 추정된다. 호산록에서 1244년 갑진년 다보탑경찬소는 다보탑 준공을 찬하는 글로써 운주사의 중앙에 이불상배(二佛相背)상이 있는 보배탑으로써 법화경 11품인 견보탑품을 표현했다.
이러하니 나의 스승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길, 보현의 참회를 오랜 동안 닦고, 다행히 도량을 세웠으나, 누가 이 대원의 경영을 이어서 보찰을 이루겠는가.
고아사혜욱오배왈 故我師兮勖吾輩曰 장수보현지참회 長修普賢之懺悔
행립도량 수계대원지경영 획성보찰 行立道場 誰繼大圓之經營 獲成寶刹
대지가 대추알 같이 작아지더라도, 자리는 뽑을 수 없는 기틀이 되고, 풍년의 기후가 조화로워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방방곡곡에서 공을 바치게 하소서.
환대지여조 좌제불발지기 丸大地如棗 坐題不拔之基
오풍십우망불화 촌지척천개입공 五風十雨罔不和 寸地尺天皆入貢
법화경은 천태종의 소의경전으로써 운주사에 법화경의 28품 변상도량을 현상구현했다. 보현도량, 법화도량을 특별행법 법화도량으로 바꾸어서, 법화경에 등장하는 석가불의 영산회상법회와 다보불의 허공회가 중첩된 이원적 공간 현장에 운주사 현장 조형물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었고, 부처님의 권능공간(權能空間)과 법화행자 염불공간(念佛空間)이 중첩되는 구조로 예불(禮佛) 예배(禮排) 예참(禮懺) 염불(念佛) 주송(呪誦)등을 위한 순환적인 회로로 법화경 28품 변상도량을 3차원적으로 이념 디자인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중하근기 무지렁이도 성불할 수 있다”는 실천 신앙장소로서 부처를 받드는 “염불, 독송(讀誦)을 잘 해도 깨우칠 수 있다”는 민중성과 평등성의 현장이었고,염불결사, 항몽도량이었다.
호산록에서의 조개동한, 보현도량, 법화행법도량, 강남 영흥산 보현사는 어디인가? 역사적 경전적인 시간 공간 인물상으로 사고해도 현 운주사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후원자로서는 당대의 실력자들인 최 우, 정화택주, 최 항, 고려 고종, 일부 관료들과 재가사들의 도움으로 양공(良工)과 왕속승(王俗僧)이 불사(佛事)에 참여했으리라 추측된다.
운주사의 조형물이 법화경 28품 변상도량으로 조성되었다고 믿는 필자들 사이에도 각 품과 조형물의 대비가 이견들이 있으므로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불법승(佛法僧)삼보(三寶)사찰이 있는데, 운주사는 탑보사찰(塔寶寺刹)로 국보 승격은 물론 사보사찰(四寶寺刹)이 되어도 손색이 없으므로 기대를 해 본다.
화순군의 운주사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환영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사(佛敎史)적 맥락을 확실히 규명하고 등재신청을 추진했으면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은 한번 심사해서 탈락이 되면 영원히 신청을 할 수가 없고 내용도 수정이 어렵다고 한다. 수원화성이 등재되어서 한양도성도 등재 할려다가 신청을 연기 하였다 한다. 심사숙고한 신청 진행을 바란다.
780여 년 동안 대원 운주사가 대추알처럼 작아졌더라도 자리는 뽑을 수 없는 기틀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염원(念願)기도(祈禱)통일(統一)민주(民主) 평등(平等) 공존(共存)호국(護國)과 호불(護佛)등을 위해 방방곡곡에서 공(貢)을 드리게 하소서.(甲辰年多寶塔慶讚疏에서 차운해서)
<참고자료>
법화경 강설; 민족사
박형상 번호사; 운주사와 법화경28품
박춘기 변호사; 와불이 사라진다
리영자저; 호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