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회 지인을 통해 외국인 환자 한 분에 대한 자문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 거주 중인 여성으로, 수개월 전 앞니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는데 보철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저는 소아치과 전문이라 임플란트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세컨 오피니언으로 자문은 해줄 수 있겠거니 해서 병원으로 오시도록 하였습니다.
환자는 올 초에 앞니 한 개의 임플란트를 심은 후, 최종 보철물을 올리려던 과정에서 충격적인 결과를 마주했다고 했습니다. 인공치아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과정에서 치아 길이가 너무 길어서 입을 벌리기가 부끄럽고, 그래서 웃을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병원에 와서 검진을 했을 때에는 인공치아는 없는 상태로서 심은 픽스쳐만 있는 상태였는데 임플란트를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한 눈에 픽스쳐가 원래 위치해야할 치조정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적절한 위치가 아닌 매우 상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치아를 발치하고 그 날 바로 식립했다는 진료기록부를 봐서는 발치와가 치유되면서 높이가 달라진 것이 아닌가 여겨지긴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방법으로는 만족할만한 보철물이 만들어지긴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환자분께 이후에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를 물어보니, 환자분이 이 부분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긴 치아를 가지고는 생활을 할 수가 없겠다라는 의견을 병원에 전달했는데 병원측은 “현재의 상태가 잘못된 시술은 아니다”라면서 정 그 병원에서 진료를 진행하기 싫으면 선납금만 환불해주겠다고 했고, 이후에는 “타 병원에 가서 우리병원이 잘못된 치료를 했다는 증명을 해오면 더 보상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환자는 여러 치과를 찾아다녔지만 현재의 환자입장이 답답할 것이라는 것은 공감해주면서도, ‘그 치과의 잘못’이라는 내용을 명시한 문서는 작성해주지 않았답니다. 환자의 말만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치과의사가 같은 동료의 과실을 증명해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건소에 민원도 넣어보고, 소비자보호원에 접수도 해보았지만 돌아온 답은 비슷하게 미온적이었습니다. 환자는 점점 지쳐갔고, 끝내 “내가 외국인이라 이런 대우를 받는 것 같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고, 제도는 벽 같고, 병원은 닫혀 있으니, 그녀의 눈엔 이 나라 전체가 벽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례는 단지 의료 사고나 환불 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늘 ‘전문적인 진실’만을 말하지만, 환자에게는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더 절박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술적으로는 허용 범위라 하더라도, 환자가 입을 가리고 살게 되는 결과를 만든다면, 과연 그것이 바른 치료일까요? 그녀가 원하는 건 ‘누군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해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아무 제도도 그 것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 역시 동료 치과의사로서 섣불리 타 병원의 시술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더 이상의 도움을 드리지는 못해서 저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신 이 일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기만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환자가 느끼는 고통과 절망의 언어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동료의 과실을 언급하는 것을 ‘비윤리’로 여기며, 전문가로서 최소한의 양심적 판단마저 유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모든 문제에 직접 겪지 않고 객관적으로 정의로운 생각과 해결방안을 도출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천은 분명 있습니다.
‘과실’이라 단정하진 않더라도, 치료의 어려움이나 한계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의견서는 작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 감정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글이 우리 치과계 안에서 작은 울림이 되어, 또 다른 ‘그녀’를 위한 길이 조금은 더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