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포스트 2000년 11월26일자
가이 구그리오타(Guy Gugliotta) 집필위원
포샤르, Dentist 명칭 처음 사용
하얀이는 富상징, 치과기술 발전
모나리자의 유명한 수수께끼 같은 미소 뒤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의 나쁜 치아를
숨기려고 했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나리자의 미소는 5백년의 세월동안 예술 애호가들을 매혹시켜 왔다. 그러나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는 나쁜 치아로 인한 그녀의 당혹감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영국 워위크(Warwick) 대학의 역사가 존스(Colin Jones)는 모나리자가 설탕과 커피와
초코렛같은 당분이 들어있는 제품이 일반대중에게까지 소개되기 전인 16세기에 살았다면
치아가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18세기는 현대 치의학이 발명되고 예방치과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로
기록된다. 1780년대 프랑스의 미술가 레브룬(Vigee-Lebrun)은 치아가 보이도록 웃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궁중사교계의 추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말 경에는 시민들은
건강한 입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고, 하얀이를 드러낸 초상화가 인기를 얻게 됐다.
최근 역사학 잡지 "과거와 현재"에 게재된 "18세기 파리에서의 발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존스는 어떻게 과학과 문화가 프랑스 혁명 이전에 공생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칫솔, 치분, 이쑤시개, 의치 등 18세기 치과기술은 상당히 발전을 했고, 중류계급이 좋은
치아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표시로 여기게 되면서 치과관련 시장의 형성도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초에는 구강위생은 정교한 학문이 아니었다. 프랑스에 있는 치과의사들은
발치자로 취급됐고, 그들이 하는 일도 치아를 뽑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치료가 항상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태양의 왕"이라고 불리는 루이14세는 상악의 치아 절반이 지나치게 열성적이었던 발치자에
의해 다 뽑혔다. 루이14세의 입천장에 끼친 이같은 심각한 피해로 인해 루이14세가 스푸를
마시려고 할 때 이내 수프는 코로 폭포물처럼 쏟아져나오곤 했다. 존스는 루이14세의
초상화를 보면 루이14세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의 움푹 들어간 볼이 구강안의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고 말했다.
존스가 제공한 그 당시의 삽화를 보면 파리 퐁네프에서 바퀴가 달린 무대위에서 치과치료를
했던 토마스(Grand Thomas)가 거인으로 묘사돼 있는데 이는 토마스가 환자로 앉아있는
사람의 입속에서 어금니를 뽑는 과정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위에서 발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시들지 않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치과의료에의 접근은 파리의 외과의사
포샤르(Pierre Fauchard)가 1728년 발표한 논문 "외과 치과의사"를 계기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게다가 포샤르는 치과의사라는 dentist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치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예방조치에 대해 기술했다.
토마스가 치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대중들을 위해 기초적인 치과진료서비스를 제공한 모든
사람들의 치과의사라면 포샤르는 다가올 신 치과의료기술의 선각자로 대비된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칫솔은 프랑스에서 상업적으로 판매가 시작됐고, 이때부터 치아,
구강진료, 치아미백제, 치분이나 잇쑤시개 등에 대한 광고가 시작됐다.
18세기는 또한 포세린의 발명을 본 시기이고 이상한 보철물을 대체한 하얀 포세린을 일반
대중들에게 제공한 시점이기도 하다. 포세린이 발명되기 전에는 기술공이 나무 등으로부터
의치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버려지는 인간의 치아를 하마의 아래턱에 식립하기도 했다.
존스는 당시 사람들, 특히 중류층의 계급들이 그들의 치아와 구강위생상태를 그들의 위상과
연계된 것으로 보고있다. 18세기 이전에 예술가들은 고풍스러움에서 그들의 초상화 구상의
단서를 잡았다. 따라서 이때 초상화는 위엄이 담겨있고, 초상화의 대상인물은 반드시 입을
다물고 있고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이상한 사람 둘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