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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삶>
양심이란 머리띠
<이정우 목사·기쁨의 교회 담임목사>

난 늘 정보에 굶주려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지식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엔 신문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에게 인터넷의 발달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정보를 얻는데 필요한 많은 시간과 수고와 비용을 덜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하면서 발견한 게 하나 있다. 낙서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장실 벽이나 주택가 담벼락의 여백을 채웠던 낙서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낙서의 무대가 옮겨졌다고 해야겠다. 화장실이나 담벼락에서 인터넷으로 옮겨졌다. 요즘 인터넷의 게시판이나 토론방을 방문해보면, 옛날 화장실이나 담벼락을 보는 것 같은 역겨움을 느낄 때가 많다. 게시판이나 토론방을 장식하고 있는 글에서 참을 수 없는 심한 악취가 난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을 거침없이 토해놓고 있다. 무슨 포르노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음란한 말들로 비위를 상하게 한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폭력적인 언어들이 상대방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양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쓰는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많은 용어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대중사회라는 말이다. 대중사회는 문자 그대로 대중이 그 사회의 주된 구성원이 되는 사회이며, 대중의 많은 속성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익명성’이라는 개념이다. 어쩌면 대중사회로의 익명성은 불가피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익명의 대중사회가 양심의 통제를 받지 못하면 고통을 잉태하는 모판이 되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중국 당나라의 작가 오승은이 쓴 ‘서유기’를 기억할 것이다. 손오공 이야기 말이다. 돌에서 태어난 손오공이 스스로 방자하여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500년 동안 오행산 돌 감옥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황제의 명으로 인도로 가던 삼장법사가 갇혀 있던 손오공을 구해주었다. 이때 손오공에게 예쁘게 생긴 머리띠를 씌워주었는데 이 머리띠는 희한한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삼장법사의 말을 듣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게되면, 손오공은 머리띠가 조여들어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받아야만 했다. 여의봉을 휘두르며 구름을 타고 18,000리를 단번에 날아가는 도술과 72가지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손오공이었지만, 이 조그마한 머리띠 때문에 꼼짝 못하고 심장법사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사실, 이 손오공의 머리띠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 양심이라는 머리띠이다. 그래서 양심은 자극이 있다. 이것을 이범선은 ‘오발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양심이란 손끝의 가시입니다.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돼요….” 그렇다. 모든 사람은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마음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고통을 당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양심을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목적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르지 못한 짓을 행할 때 고통을 느끼도록 하심으로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신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심판의 증거로 삼기 위함이다. 영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아는 자가 둘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요, 또 다른 하나는 양심이다’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직접 감찰하시고 양심으로 그 증거를 삼으신다. 성경은 바로 이 양심이 증거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익명성 속에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양심의 고통을 감수한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손오공에게 머리띠가 복된 것이었듯이,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다. 다시! 풀어놓은 양심의 머리띠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