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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대정성지(大靜聖址)와 정난주
김병태(광주 대인치과 원장)

제주도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정성지 단장 일상생활을 훌훌 털어버리고, 기다렸던 병원 여름휴가를 3박 4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추사적거지를 가다가 대정성지(大靜聖址)를 발견하여 흐믓함이 배가되고, 여름휴가가 끝났어도 더욱더 즐거웠고 여운이 오래 오래 남는다.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나주본관 정약현과 경주본관 이씨(李氏) 사이에 태어나 명연(命蓮)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선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若銓), 약종(若鐘), 약용(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벽의 누이였다. 당시 천재소리를 듣던 황사영(黃嗣永)과 혼인 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기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선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정조대왕이 죽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8개월간 토굴에서 생활하면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를 썼다. 이 백서는 박해의 전말과 순교자의 30여명의 행적, 교회의 재건방안을 적어 베이징주교에게 보내려던 청원서다. 가로 62cm, 세로 38cm 크기의 백색비단에 1만3천3백84자(122행)의 깨알같은 붓글씨이다. 이 백서가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어 1801년 음 11월 5일 서모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는 거제도에, 처인 정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향을 가게되었다. 정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 21일 두살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향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어씨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후 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6대째 살고 있다. 제주목관노로 정배된 정난주(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서울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2년 뒤(1840년)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모슬포로 9년 동안 귀양을 오게된다. 다산(茶山) 정약용과 백련사 혜장스님과의 다(茶)에 대한 이야기, 그후 다산과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장한 대둔사 초의선사와 관계는 초의선사가 그린 불화풍의 다산의 초상화에서 알수가 있고, 추사 9년 유배동안 초봄에 딴 차를 말려서 제주도까지 5번 이상을 다녀온 초의선사와 추사의 우정은 각별했으며, 추사는 대정 추사적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정난주는 당대 최고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꽃다운 신혼생활도 잊은 채 하루아침에 양반신분에서 평생을 관노(官奴)로써 생을 마감하면서도, 그녀 삶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증거의 연속이었다. 그 후 제주도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단장하여 대정성지(大靜聖址) 로 단장했으며 순교자와 함께 성인(聖人)에 추대되었다. 그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들은 지금의 우리들의 시대적인 배경과는 물론 다르겠지만, 현재 우리들의 생활에서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된 것만 같다. △대정성지(大靜聖址)는 추사적거지의 바로 옆벽에 있고, 천주교 대정성지는 추사적거지에서 북서쪽으로 5분 정도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대정성지 표지판이 나옴. 여기서 좌측으로 500mm 정도 따라가면 정난주(마리아)묘소가 나옴. △모슬포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사람이 살수가 없다고 해서 `못살포"라고 유래됐으며, 대정(모슬포)이 현재의 지명임. △황사영 백서는 1925년 로마 교화청에 있다가, 76년만에 한국에 와 절두산 순교박물관에서 2001년 8월 15일부터서 10월 15일까지 전시한다. 초의선사의 정양공 초상화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