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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삶>
가을날의 행복
<이정우 목사·기쁨의 교회 담임목사>

동역하고 있는 목사님 가정과 광릉수목원엘 다녀왔다. 단풍을 구경하고 싶어서다. 단풍 하면 내장산이나 설악산이 떠오르지만 우리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목회자가 휴식하는 월요일 하루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모처럼의 소풍에 아이들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놈에겐 미리 결석계를 내도록 했다. 가족과 함께 하며 자연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공부라는 생각에서다. 재잘거리는 토끼들을 태우고 한 시간정도를 달리니 수목원이 어머니처럼 반겨주었다. 너무 좋았다. 녹색 필터에서 나온 공기도 시원하고, 작지만 노래하듯 흐르는 냇물도 다정했다. 좋은 곳에 터잡고 사는 부러운 새들의 날개도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압권은 단풍이었다. 가을 높은 하늘, 그 아래에 수목(樹木)이 흠뻑 취해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고울 수 있을까. 그야말로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화가의 상상의 붓끝에서도 기대할 수 없는 색의 조화, 자연 속에 임재한 신(神)의 색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감탄사가 많으면 천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입가에선 연신 그것이 박수처럼 터졌다. 우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참 행복한 하루였다. 난 분위기를 좀 타는 편이다. 지난 추수감사절 주일에도 그런 내 마음에 발동이 걸렸다. 그래서 차를 타고 들판으로 나가서 갈대를 꺾고, 물든 가을 낙엽도 주워왔다. 갈대 잎으로는 설교단 주위를 장식하고, 낙엽은 바닥에 펼쳐 깔았다. 토요일 오후에 교우들과 장식을 하면서 몹시 기분이 좋아지더니, 감사주일 날, 설교단 밑에 앉아서 갈대 잎새를 보는데 내 목젖을 타고 노래가 올라왔다.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올라가는데 낙엽 밟히는 소리가 났다. 순간 시 한 구절이 내 입술을 간지럽게 맴돌았다.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이 가을에 내가 보고 즐긴 것은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주위에 흔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길가에도 있다. 논과 밭 사이에도 있고, 산기슭이나 언덕에도 있다. 아파트 화단 옆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담장을 타고 올라가기도 한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수소문 할 필요도 없다. 무슨 권력 있는 사람에게 청탁을 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땀흘리며 크게 수고한 것도 아니다. 그저 널려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이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세상에 널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행복으로 가득히 채워 놓으셨다. 그것은 길가에도 있다. 산에도 있다. 오솔길에도 있고, 하늘이나 들판에도 있다.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에도 있고, 저녁 식탁에서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우리의 일상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소유하려고 애쓴다고 얻는 게 아니다. 돈이나 명예 따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다. 널려있는 것을 누리면 된다. 사람은 다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지 않던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바로 그 행복이 주위에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공짜로 세상에 널려있다. 문제는 눈이다. 마음의 눈이 떠져서 그것을 보아야 누릴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행복을 보는 것을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음의 눈을 떠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시각장애인을 고치시면서 마음의 눈을 뜨라고 외치셨다. 특별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시각장애인이다”라고 일갈하셨다. 가장 잘 보아야 할 그들이 보질 못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마음의 눈이 뜨는 것, 이것이 구원이요, 행복의 출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