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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삶>
“누구시지요?”
<이정우 목사·기쁨의 교회 담임목사>

참 무안한 일을 당했다. 어저께 길거리를 지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얼떨결에 같이 목례는 했지만, 도무지 누군 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 하기는 한 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 우리 교회에 나왔던 분이 아닌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종잡을 수가 없었다. 참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누구시지요?” 그러자 부인은 멋쩍게 웃으면서 “1층 사는 사람이에요”하고는 총총히 걸어갔다. 내가 사는 집은 3층 짜리 주택이다. 모두 여섯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 아주머니는 1층집 부인이었던 것이다. 순간 난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도 못 알아보다니….’ 참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이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사실 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같은 아파트나 주택에 살아도 남남처럼 살아가는, 너무나도 삭막한 이 도시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은 강한 충동도 느끼며 살아왔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우리의 환경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훈훈한 정과 이웃의 인정이 오가는 세상으로 바뀌기를 바랬다. 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고, 이웃의 중요성을 깨닫자고, 이웃과의 참된 삶을 회복하자고 설교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삭막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 범인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셈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 목공(穆公)은 아들들을 진나라와 형나라로 보내어 거기서 벼슬을 하게 했다. 노나라는 이웃 나라인 제나라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진과 형 두 강대국과 친해져서 위급할 때 도움을 받으려는 심산이었다. 목공의 그러한 계획에 대해서 이서가 간언하였다. “월(越 : 먼 데 있는 나라를 일컫는 말)에서 사람을 얻어 와서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려 하면, 결코 물에 빠진 자식을 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 데 물로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합니다. 지금 진과 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제는 가까이 있습니다. 제나라가 침공해 오면, 멀리 있는 강대국은 노의 재앙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먼 데 물로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는 말은 먼 데 있는 것은 급할 때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명심보감’에도 같은 말이 있는데, 그 뒤에 “먼 곳의 어버이는 아까운 이웃보다 못하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것이 “이웃 사촌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속담의 원류라고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친척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나도록 하셨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다. 그래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정말 이웃사촌이 친척보다 더 중요한 게 사실이다. 실제로 함께 나누어야 하는 일도 많고, 협조해야 하는 일도 많고, 이해하고 도와야 하는 일도 친척보다 훨씬 많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잘 살기 위한 사람의 본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잃어버린 세상은 그야말로 삭막해 질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쓴 ‘무신론자’라는 책에 신앙을 상실한 한 청년이 나온다. 그 청년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도, 영혼도, 이상도 없고 오로지 물질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이익만 취하면 된다고 여겼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전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항해 중에 물에 빠진 부인을 건지려다가 익사한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 대목을 번역하다가 통곡을 하면서 실신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의사의 간병으로 회복된 후, 그의 비서의 일기를 통해 그 통곡한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남의 위급함을 방관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성(靈性)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다.” 한 가지를 굳게 다짐한다. 이웃을 향해서 “누구시지요?”라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