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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삶>
구리기쁨의교회 이정우 담임목사

내일도 바람이 불 것이다 풀밭에 앉아보았다. 봄기운을 느끼고 싶어서. 발밑에서부터 작은 친구들이 손짓하며 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생명이란 참 신비하다. 반복을 싫어하는 못 돼먹은 성깔을 가진 나를 매번 똑같은 색과 향으로 감동시킨다. 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것도 아닌데 초록약속은 언제나 지켜진다. 그러나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바람 때문이었다. 우리의 만남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불어대는 이 악동의 방해 때문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사나운 바람이 영 마뜩치 않았다. 어린 싹들과 가지에게도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들어 이런 바람이 잦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이 야속한 ‘3월의 바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런데 참 놀랍고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 ‘3월의 바람’이 새싹과 가지들이 자라는데 참 좋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새순이 돋아나 올라올 때 꼭 필요한 것이란다. 이유인즉, 초봄의 바람은 순과 가지들을 세차게 흔들어 줘서 새잎을 내는데 필요한 영양분이 위로 잘 올라가도록 돕는단다. 즉 뿌리의 영양이 겨우내 활동을 멈춘 줄기를 타고 새순까지 잘 공급되려면 바람에 흔들리는 운동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시련과 고통은 만물의 보약인가 보다. 우리는 아름답고 고운 양탄자가 깔린 길을 걷고 싶어 한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나 엉겅퀴가 찔러대는 골짜기를 원하지 않는다. 가시밭길은 돌아가고, 웅덩이는 피해간다. 아픔은 비극이고, 고통은 불행이며, 고난은 절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해 주는 성경 이야기를 참지 못하던 친구가 이렇게 화살을 쏘았다. ‘너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그 하나님이 왜 네가 당하는 고통에는 침묵하는가?”라고.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신을 쫓아버릴 정도로, 고통이라면 진절머리를 낸다. 맞다. 고통은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배은망덕한 인간에 대한 그의 복수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분은 당신의 속내를 모든 이에게 꼭 알리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뜻은 아주 옛날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고대인들에겐 ‘트리불룸(tribulum)’이라는 이상한 소도구가 있었다. 곡식의 낱알을 때려 껍질을 벗기는데 사용되었다는데, 이것으로 두들겨서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얻었단다. 영어의 ‘고난(tribulation)’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단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두들겨서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그의 생활을 두들겨서 내면의 고갱이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없으면 참된 자아가 드러나지 않는다. 영국의 조지 왕은 형 앨버트 빅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물려받은 왕위 때문에 몹시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전시되어 있는 도자기들을 감상하면서 둘러보다가, 그는 두 개의 꽃병이 특별히 전시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살펴보니 두 꽃병은 원료도 같았고, 무늬까지 똑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는 멋진 예술품이었는데 비해, 다른 것은 투박하고 볼품없었다. 왕이 공장장에게 물었다. “왜 서로 다른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두었소?” 공장장이 말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웠고, 하나는 굽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것이 두개의 꽃병을 나란히 전시해 둔 이유입니다.” 내일도 바람이 불 것이다. 그래서 난 봄의 새싹들을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바람 속에서, 초록 꿈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