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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삶, 구리기쁨의교회 이정우 담임목사

쉼표가 있는 생활


형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 수년 전부터 간에 경화(硬化) 기미가 보였는데 요즘 더 심해진 것 같다. 과로 때문이다. 손짓하는 일에 결코 몸을 사리지 않는 성격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우리는 삼 형제가 다 목사다. 목사라는 게 하기 나름인데, 우리 형들은 좀 유별난 것 같다. 몇 해 전엔 큰 형님이 과로 때문에 쓰러져 목회를 그만두셨는데, 이제 둘째형도 걱정이다. 일찍 돌아가신 어느 목사님의 부인이 언젠가 한숨을 쉬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쉼표 없는 목회는 오래 가지 못해요.”


시지프스 신화다. 시지프스는 제우스신의 저주를 받아 일평생 무거운 돌을 언덕 위로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무거운 돌을 있는 힘을 다해 올리면 굴러 내려오고 또 죽을힘을 다해 올리면 또다시 굴러 내려오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라 일만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데 슬픔이 있다. 아무리 바위를 올려놓아도 또다시 미끄러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끝없는 반복이 그의 운명이다. 이 시지프스의 불쌍한 운명을 곱씹다 보면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20세기 위대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어떻게 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그렇다. 조물주께서 낮뿐만 아니라 밤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사는 것들의 존재원리를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간다. 스텐리 코렌의 ‘잠 도둑들’이란 책의 표지에는 이런 넋두리가 있다. “누가 우리의 잠을 훔쳐갔나?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24시간 풀 가동하는 시스템들이, 조금만 자야 성공한다고 말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통신망들이 우리를 이부자리 밖으로 내몬다…. 우리 사회는 잠을 적게 자는 것을 영웅시하고 잠이란 시간 낭비고 게으른 버릇이라고 비난한다.”


언젠가 조수미씨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장난생각을 했다. ‘조수미씨를 죽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녀에게 쉼표 없는 악보를 건네주는 것이다.’(^^) 그렇다. 어느 악보에나 다 쉼표가 있다. 쉼표 없는 악보는 하나도 없다. 몇 마디쯤 부르다 보면 ‘잠깐 쉬었다 가시오’라는 지시가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무슨 ‘정지신호’쯤으로 생각하지만, 쉼표 없는 음악이란 상상할 수 없다. 음악은 쉼표 때문에 숨을 쉰다.


동양화를 볼 때마다 그 고상한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든다. 동양화의 매력은 어디에 있던가. 그렇다. 여백에 있다. 여백을 잘 활용한 그림 속을 들여다보면 신선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여백 때문이다. 그런데 여백은 그냥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공간이 아니다. 여백도 그림이기 때문이다. 동양화는 여백이 있기에 사는 것이다.


쉼표가 있는 인생, 이것을 보다 더 근본적인 쉼으로 승화시킨 말이 기독교의 ‘안식’이라는 말이다. 피조된 첫 인간이 그 창조주와 더불어 자연을 거닐면서 누림을 가졌던 그 쉼 말이다. 기독교들이 그 쉼을 꿈꾸며 애송하는 시편의 한 구절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 또 그 아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쉼을 이렇게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쉼의 출발이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쉼을 얻을 수 없다. 그 마음은 악한 ‘교만’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창조적 질서를 따라 자신을 관리하는 것, 이것도 좋은 겸손이다.


“쉼표 없는 목회는 오래 가지 못해요.” 오래하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