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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삶- 허엽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실자]용서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


얼마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장면을 보았다. 그 부인은 어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버려서 고아원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가정에 입양되어 살았는데 새 어머니와의 불화로 스무살이 되기전에 집에서 가출하고 말았다. 낳아주고 길러준 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 불쌍한 여인은 세상의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살았다. 마음속으로는 두 어머니, 특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증오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눈물과 회한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착하고 부지런한 남편은 자신을 마음으로 사랑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처음으로 맛보고 행복한 삶을 살게된 것이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믿음도 갖게 되었다.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었다. 어느날 용기를 내어 길러주신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두 모녀는 화해를 했다. 또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도 화해를 하고 싶어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 드디어 전화를 통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여인의 절규와 오열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엄마, 나는 엄마를 다 용서했어. 옛날에는 엄마가 무척 미웠어. 그런데 나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었어.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엄마가 더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펐다는 것을… 엄마, 보고싶어요.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한한 용서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어떻게 용서하라는 것인가? 한번도 힘든데 더구나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가 아닐까? 특히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인간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라…”
어쩌면 용서하라는 것은 사랑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바로 용서에 있다. 내가 다른 이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 살았는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또한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를 솔직하게 반성해야 한다.
사랑의 계명은 한 마디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의 결과이다. 나는 잘못이 없지만, 동정과 사랑으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용서는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러므로 용서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하느님은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실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겨난다.
내가 이웃과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혀 교회나 절에 나가 제물을 바쳐도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