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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삶/황재국 목사]비판과 격려

어느 수도원에 여러 명의 수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른 수사들로부터 ‘땡땡이 수사’라고 불리우는 수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예배시간에도 가끔 지각하고 기도시간도 잘 빼먹고 복장도 불량스러웠기 때문에 수사 같지 않는 수사라는 뜻으로 그런 별명을 얻은 것입니다. 어느 날, 수사들 모두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땅에서의 삶을 평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땡땡이 수사의 점수가 높게 나왔습니다. 그의 행실을 잘 알고 있는 동료들이 부당하다며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땡땡이 수사는 수사가 된 이후 의식적으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쩌다 의견충돌이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즉시 다른 사람과 화해했다.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나와 귀를 씻었다. 나는 분명히 성경에 ‘남을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 받지 않으며 용서하면 용서받는다.’고 했다. 땡땡이 수사는 판단하지 않았으니 판단 받을 것이 없고 용서 했으니 나도 그의 모든 것을 용서했을 뿐! 그에게 특별한 점수를 더 준 것은 아니니라.”


프랑스의 뤼시앵 레뇨가 사막 교부들의 이야기를 모아 쓴 ‘내 여인은 광야에서 산다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의 약점과 헐뜯을 곳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치 다시는 얼굴을 맞대지 않을 양 인신공격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에 억류된 인질들의 생사에는 관심도 없는 채 기독교에 대한 비방의 글과 문자들이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중요한 것과,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天下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지음 받은 서로를 너무 쉽게 저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누에고치가 실을 만들어 내고 누에가 그곳에서 살듯이 인간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해 복과 화를 누리게 됩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67세 때의 일입니다. 보험에도 들지 않은 그의 공장에 불이 나서 삽시간에 모든 것이 처참한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런 에디슨에게 헨리포드가 나타나 75만짜리 수표를 내밀며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 돈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포드가 왜 그렇게 관대하고 너그러웠을까요? 오래전 헨리포드가 자동차를 만들려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 에디슨을 찾아가 자동화의 원리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반복되는 숱한 질문들 앞에, 에디슨은 짜증 내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보게 자네가 하는 일은 대단한 일일세. 앞으로 우리나라의 교통수단 분야에 획기적인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확신하네!” 훗날에 포드가 고백하기를 에디슨의 격려와 칭찬에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실패하여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실의를 극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차가운 비판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와 사랑입니다. 특별히 가까이 있는 사람, 누구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해 줄 것 같고 내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판단과 정죄를 받으면 마음에 크나큰 상처가 됩니다.
무심코 한 나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의 입술은 오늘 비판의 입술입니까, 격려의 입술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