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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건의 여행스케치>
"가을, 그 벼익는 마을"(上)
안동 대곡리, 용계리

어느덧 가을은 우리곁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또다시 대중가요의 가사 하나하나가 모두 나만을 위한 비가(悲歌)가 되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옛사람의 얼굴이 새삼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잊었든, 그 사람에게 잊혀지는 사람이 되었든, 어차피 겪어야 할 가슴앓이 계절입니다. 지난 주말(8/25~26) 경북 안동 대곡리와 용계리의 오지를 다녀왔습니다. 임하댐 상류의 깊숙하게 숨겨진 마을이었지요. 집 한 채가 마을의 모두인 곳도 있었습니다.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넘어가던 고갯길은 세월의 무심함 속에 잡초밭이 되었고, 뜨거운 가을빛에 붉은 능금이 익어가는 그 곁 수풀속엔 차가운 꽃뱀이 인기척에 스스로 어둠을 찾았습니다. 토요일(8/25) 밤, 폐교 마당에서 은하수를 보았습니다. 정말 그것이 은하수였는지 자신은 없지만, 어릴적 고향마당에서 봤던 별무리의 긴 강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대답해 줄 수 있는 어른들을 찾아 깡총거리던 제 어린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답니다. 모닥불을 피우고 늦은 대화를 나누고, 새벽 언저리에서 또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일요일(8/26) 아침. 폐교 마당에는 말려놓기 위해 묶어 세워 논 깨 둥치(?)들이 조회시간 줄 서있던, 떠나버린 아이들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뙤약볕 속에 생기없는 폐교는 낡을 대로 낡아서 그저 펄럭거리는 빛 바랜 깃발 같았습니다. 부모따라 도시로 나간 아이들은 이 곳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먼훗날, 나이들어 새삼스레 옛 일이 생각나 어쩌다 물어물어 찾아온다해도, 그때에도 이 학교는 아이들 앞에 지금처럼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낡은 깃발은 곧 부서져버릴 것처럼 지쳐 보였습니다. 일요일(8/26)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이 목덜미에 떨어졌습니다. 트레킹할 마을 이름도 생소해서, 한실-모티-검단-가멸-하지골을 거쳐 다시 폐교로 돌아오는 코스였습니다. 높지않은 골짜기에 야트막한 사과밭을 일구며 마치 세상을 피해 들어온 은둔자들처럼 하늘아래 나즈막히 사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뭉클한 벼 익는 냄새가 바람과 함께 마을을 휘돌았습니다. 마을 곁을 흐르는 냇물은 녹조가 극성이어서 고개를 돌리게 했습니다. 밭두렁에 심어논 조가 새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망을 씌워놓기도 했구요. 물 동냥을 하기 위해 들어간 농가에서는 볕에 말린 고추를 다듬느라 할머니들의 손길이 쉴 틈이 없었습니다. 베낭을 짊어진 형형색색의 도시인들이 집안에 들어서자 농가는 금새 왁자한 장터처럼 변했습니다. 산골 인심이 넉넉하기로 그처럼만 할까요. 콩 알갱이가 듬성거리는 된장에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섞어서 양푼에 퍼담은 밥과 함께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처마 밑에 주저앉아 아주 맛있게 비벼 먹었답니다. 농사지어 생활하기 힘들고, 길이 험해 세상으로 나가기도 힘들다고 우리에게 하소연하시던 촌로(村老)의 세상푸념에 조금 숙연해하기도 하면서요. 농가 옆에는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돌볼 사람들이 없어 대문앞엔 잡초가 무성했더랬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미 고향을 떠나버린지 오래고, 남아있는 노인들도 몇 안되어 농삿일도 힘에 부친다 했습니다. 그렇게 노인들만 남겨진 우리들의 고향은 또 어쩌면 도시 속의 젊은이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힘들 때나 서글플 때 그저 무심히 떠올리는 우리들의 고향에서 나이드신 우리들의 부모님은 또 그렇게 잊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숫대를 걸치고 진흙을 개어 발라놓은 흙벽을 문질러 고운 가루로 내어 먹던 어린 시절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