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522번째
릴레이수필
세명의 딸
황 윤 숙
한양여대 치위생과 교수
매년 방학이면 한차례 홍역을 앓듯이 앓아 누어야 했는데 이번 방학은 그럴 여유조차도 사치였는지 몸살 한번 찾아오지 않고 잘 넘기는 듯 했다.
하지만 그건 일에 밀린 결과였고 논문 하나를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렸던지 아니면 그간의 피로를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서인지 드디어 자리를 보전하고 눕고 말았다.
작은 사각의 공간에 누워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목마름으로 인한 물 한 컵을 얻기 위해 혼신을 다해 식구들을 불렀다. 거실의 TV 소리는 내 외침을 삼켜 버렸고 부르다 지친 나는 이내 고열로 인한 잠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잠결에 내 가슴 저 아래 묻혀 있었던 소리가 시간의 강을 건너 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내 철없던 시절 어머님은 병석에 누워 계셨고 어머님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어머님이 기거하는 방으로 TV를 옮겨 놓았었다.
지금처럼 흔한 리모콘이 없는 로터리 방식이라 우린 어머님의 편의를 위해 긴 막대기 끝에 홈을 파서 편리함을 드리고자 했다. 어머님은 그 긴 막대를 이용해서 TV채널도 선택하시고 또 그렇게 문을 두드려 우리를 찾으셨다.
그 막대기는 어머님과 우리를 잊는 작은 통신 수단이었다.
오늘 이렇게 작은 방의 어둠 속에서 문을 두드리던 어머님의 소리가 이렇게 가슴에 못질을 하듯이 크게 울려 퍼진다.
숙아~~, 숙아~~ 하시면서…
유난히 까탈스러웠던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 때 흰밥이 나오는 걸 싫어했다. 아침이면 어머님은 힘든 몸을 이끄시고 배를 움켜지신 채 흰밥 싫어하는 다섯째 딸을 위해 매일 김밥 도시락 두개를 마셨다.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식탁으로 향하던 내가 배가 아픈 것도 아닌데 어머님의 모습처럼 배를 움켜지고 걷게 됨은 무슨 연유일까?
뜨거운 물에 지친 몸의 피로를 풀어보라는 남편의 권유로 온천을 갔다. 3년째 그 곳에서 때를 밀어주는 30대 후반의 안면 있는 아낙이 반가운 듯이 나를 맞아 준다.
자식 여러 명을 잃고 겨우 얻은 8살 난 아낙의 딸이 늘 엄마 곁을 지키고 있다. 아낙은 그간 몸에 병이 생겼는지 여러 군데 부황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쉴 틈 없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참을 일하던 아낙은 지친 몸을 세우고 당근 주스 하나를 뜯었다. 8살의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아낙을 보챈다.
단 한모금의 주스로 허기를 달랜 아낙은 남은 음료를 딸에게 주고 또 생업에 매달린다.
언제인가 자신의 몸을 새끼의 먹이로 내어 놓는 거미이야기가 생각난다.
혹여 자신의 마음이 변할까 하여 도망갈 수 없도록 입구를 거미줄로 막아 버리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에미란 그런 마음일 게다.
온천욕이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었는지 다녀온 뒤 더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학교에서 다녀온 딸이 부엌에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잠시 후 딸이 쟁반에 작은 식사를 차려다 놓고 날 일으켜 세운다.
흰밥을 삶아서 죽을 만들고 소화가 쉬운 반찬 몇 개를 작은 그릇에 담아 침대 위 내 무릎에 얹어 준다. 죽을 끓일 수가 없어 밥을 삶았다고….
철없는 딸은 병든 엄마에게 늘 김밥을 싸게 했건만 철없는 엄마는 딸이 차려준 호사스러운 밥상을 받아들며 목이 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가냘픈 부름이 아직도 귓가에 남았건만 난 이렇게 작은 손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