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치과인상’ 강대건 원장은?
올해 82세인 강대건 원장(강대건치과의원)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57년 서울치대를 졸업했다.
61년 육군 포병학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63년 서대문구에 ‘강대건치과의원’을 개원하고 개원의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강 원장은 70년대 중후반 주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학도를 대상으로 무료 구강검진을 했다.
이후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 광주 가톨릭대 등 재학생을 대상으로 반경을 넓혔지만 한센인과의 연은 아직 이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79년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던 강 원장은 봉사 모임인 ‘녹야회’의 일원으로 포천 한센촌을 찾고 나서부터 한센인 봉사진료에 투신한다.
그 후 34년 간 안양, 영남·호남의 한센인 마을을 다니며 혼자서 진료를 했다. 일요일 아침 7시에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오후 7시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강행군이었다.
제작한 틀니만 5000여 개, 진료한 환자만 1만 5000여 명에 달한다. 재료비만 받아 경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해당 마을에 기부했다.
체력의 한계를 느껴 지난해 한센인 진료에서도 은퇴한 강 원장은 지난 9월에는 천주교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품에 안았다. 교황청이 서훈하는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받은 것으로 이는 100년이 넘는 한국 가톨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만한 ‘경사’였다.
천주교인에게 세례명은 하늘이 내린 이름이다. 강대건 원장의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실제로 강 원장이 걸어온 삶의 궤적은 ‘성인’ 라우렌시오와 유사하다.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사람의 대부’로 통한다.
헌신적으로 헐벗은 이를 구호한 그는 집정관이 교회의 보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고는 순교했다.
강 원장이 반추한 34년 세월 속에는 ‘교회의 보물’ 같은 거창한 단어는 없었지만, 담담한 가운데 느껴지는 ‘강한 신념’이 있었다.
“돈이나 상을 바라고 봉사를 했으면 30년 넘게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런 욕심이 끼어들면 오래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그저 이 땅에 태어나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절대자에게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내겐 중요하다.”
# “소외이웃 돌보는 것은 치의 소명”
치협은 지난달 23일 올해의 치과인상 선정위원회(위원장 최남섭) 회의를 열고 ‘제10회 올해의 치과인상’ 수상자로 강대건 원장을 선정했다.
최남섭 부회장은 “강대건 원장은 34년 간 한센인을 위해 무료 진료봉사를 했고, 올해 9월에는 한국 가톨릭사에 길이 남을 교황청 훈장을 수훈했다”며 “종교를 떠나 대한민국 치과의사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대내외적으로 치과의사의 위상을 드높였다”고 말했다.
강대건 원장은 지난달 27일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천주교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훈장도 수여한 이상 상에 대한 욕심은 없다. 다만 한 사람의 치과의사로서 후배들에게 봉사의 기쁨을 알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그는 “지금은 치과계 내부의 경쟁이 극심해지고 생존이 목표가 돼 선배로서 가슴이 아프다”면서 “그러나 의사의 소명 중 하나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도 있다. 후배들이 진료실에만 갇혀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봉사의 기쁨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따귀 때리는 환자에 돈 주며 진료
강대건 원장은 현재 봉사 여정을 마감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진료기록, 접수사항이 적힌 빼곡하게 적힌 노트 열댓 권을 캐비닛에서 꺼내 기자에게 펼쳐 보였다. 그는 “누구에게 보이려고 기록한 건 아니지만, 이 노트들은 사후에 치과박물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 원장은 노트 한 권을 펼쳐 빛바랜 사진을 보여줬다. 고 이경재(알렉산델)신부였다. “이 분 덕에 한센인에 대해 알게 됐다. 안양 나사렛마을에서의 14년 간의 봉사를 도와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강 원장은 이 신부와 함께 한센인의 피고름을 받아내며 진료하고, 움막촌이었던 나사렛마을을 번듯한 한센인촌으로 가꾸는 데 힘을 보탰다.
강 원장에 따르면 그의 봉사는 안양을 거점으로 한 초기 14년과 대구를 기반으로 영호남을 누빈 후기 20여 년으로 나뉜다. 사실 강 원장은 진료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했다.
“안양 같은 곳은 그나마 나았다. 영호남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한센인이 훨씬 많았다. 이쪽 한센인은 ‘문딩이’라고 불리기도 해 성정이 매우 거칠었는데, 막무가내라서 심지어 따귀를 맞기도 했다. 치료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늘 비자금을 갖고 다니며 분쟁이 생길 경우 돈을 쥐어주며 체어에 앉혔다.”
#봉사 외길로 34년, 오직 감사 뿐
강 원장이 주말을 온전히 바쳐가며 진료한 한센인은 총 1만5000여명에 달한다. 초기에는 발치만하다가 틀니까지 점점 치료영역을 넓혔다. 처음에는 한 푼도 받지 않고 하다가 “그러면 절대 오래할 수 없다”는 주위의 만류에 재료비만 받았다.
그마저도 경비를 제하고 모두 해당 마을에 기부했다. 영호남에 기부한 액수만 1억4000만원에 달한다.
“대구 칠곡에서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한국가톨릭자조회 총재)와 함께 진료를 보면서 유럽의 기부 문화와 검소함에 놀랐다. 그를 통해 나눔의 기쁨에 대해 깨달았다.”
이런 공로로 교황의 훈장을 받고, 한센인 모임인 가톨릭자조회의 감사패를 받았지만 강 원장은 되레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강 원장은 “뒤돌아보니 그 분들 덕분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분들에게 감사하고, 이런 모든 일을 참아 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이렇게 기쁘게 살게 돼서 아무런 유감이 없다. 백 번, 천 번 감사드린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