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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기행(3)>
흥선군의 야망 . 집념
"남연군묘’에 담겨있어

흥선군, 선친 남연군의 묘 이장위해 조선말 대사찰 가야사 소각 단행 이후 안동김씨 약화 왕실중심 정치복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특정한 집단, 소수의 집단이 정권을 농단하면 나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원칙처럼 이어져왔다. 중국에서는 환관과 외척 세력의 다툼으로 수많은 왕조들이 몰락의 길을 걸었고, 이 땅에서도 소수의 권력집단이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조 말도 그러했다. 정조임금의 승하 후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정순왕후(영조 계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통하여 경주 김씨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15세가 되어 순조의 친정체제로 돌아서자 이번엔 중전(순원왕후 김씨) 문중인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이어졌다. 그밖에도 풍양조씨들이 한때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대체로 안동김씨들의 세상이었다. 이후 안동김씨들에 의해서 헌종, 철종이 차례로 전주 이씨의 항렬마저 무너뜨리며 등극한다. 종친 중에서 똑똑하게 보이는 이는 안동김씨 일족들에 의해 온갖 누명에 의해 죽거나 유배를 보내졌기에 기실 살아있어도 목숨부지하기 어려웠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철종 즉위 초, 서른을 넘긴 흥선군(興宣君)은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일러주는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청도땅 가야산 동편엘 가면 천하의 명당이 있습니다. 주위를 장엄하게 싼 산자락 가운데에 있는 혈자리는 금반헌화형이며, 힘있는 산들이 이곳을 향해 다투니 오룡갱주요, 그 역량으로 말하자면 공후지지 기세로서 발복은 족히 2대 천자가 나올 터가 확실합니다.”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 지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흥선군은 이미 왕릉조성에 깊이 관여했던 경험이 있어 첫눈에 그 자리를 알아보았다. 지관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가야산 동남쪽은 흙이 많고 산으로 둘러싸인 텃자리 한가운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는데 뛰어난 인물(부처)의 궁궐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뛰어난 자리이긴 한데, 이미 가야사라는 대사찰이 들어서 있고, 혈자리라고 여겨지는 곳에 가야사 금탑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가야사는 근처의 수덕사보다 큰 규모를 가진 충청도 일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어렵사리 안동김씨의 허락을 얻어낸 흥선군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경기도 연천에서 충남 덕산의 가야산까지 머나먼 길을 이장하였는데, 왕실의 이장답게 새로 만든 상여에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중계하며 엄숙히 진행되었다. 면례가 끝난 후 상여는 맨 나중 구간 운구를 담당하였던 ‘나분들’ 동민들에게 선사되었고, 지금도 이것은 보존되어 보호되고 있다.(중요민속자료 제31호) 첫 면례지는 가야사에서 400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구광터’라고 부른다. 흥선군의 계획은 치밀하였다. 향토사가인 박성흥씨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장 다음해 흥선군은 성묘를 빙자하여 덕산에 내려와서는 마곡사로 사람을 보내 중을 초지하니 스님 셋이 왔다. 흥선군은 승려들에게 ‘나라와 종실을 위하여 가야사를 소각하여야 하겠으니 이 절에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항거하였지만 흥선군의 위압과 강요에 견디지 못하여 끝내 하는 수 없이 불을 지르고 말았다. 찬란했던 가야사는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있었지만 절 뒤 작은 봉우리의 ‘金塔’만이 홀연히 남아 있어 그 보개는 아침햇살을 받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가야사가 불탄 다음해(헌종 12년, 1846) 흥선군은 세형과 함께 선친의 묘소를 찾아 민가에 머물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그때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흰옷을 입은 금탑의 신이 삼형제의 꿈에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빼앗으려 하느냐? 진정 너희가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묘를 이장하려 한다면 너희들은 폭사할것이며 네 형제는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흥선군은 ‘그렇다면 진실로 좋은 자리임에 틀림없다. 운명이란 하늘에 달려있거늘 탑신이 어찌 우리에게 화를 미칠수 있으리요.’라고 하며 직접 도끼를 들고 나가 석탑을 허물었다” 석탑을 허물고 난 흥선군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둘째 아들 명복을 태어나자 남연군묘 이장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흥선군은 철저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파락호 생활로 들어선 것이다. 어슬렁거리며 남의 상갓집에 가서 공술이나 얻어먹는 상갓집의 개로 통했다. 어떤 날은 외상술값 대신 기생의 다리 사이를 기면서 성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화양서원을 방문했다가 문기기에게 발길로 걷어차이기도 했다. 파락호 생활로 접어든지 11년째 흥선군은 조대비를 은밀히 만났다. 철종이 승하하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