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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기행(4)>
“역사의 향기와 단풍을 한꺼번에”

단풍철에 만나는 단종의 작은 왕국 단종이 묻힌 광릉 단풍 유난히 선명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적에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 앉았어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들 마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단풍이 서둘러 왔다. 단풍은 강원도에서 시작된다. 크고 작은 산 가릴 것 없이 골고루 색감을 흩뿌리며 남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10월의 강원도 여행은 가을이 연출하는 파스텔톤의 자연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덤으로 얻는다. 어린 임금 단종의 작은 왕국 영월로 간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길을 떠났던 단종. 17살의 나이로 죽어 동강에 버려진 아이 이홍위를 찾아간다. 중앙고속도로 신림IC에서 영월 주천으로 접어든다. 영월로 가는 길은 제천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빠르다. 그럼에도 어려운 주천(酒泉)길을 택한 건 어린 임금 단종(이름 이홍위)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기 위함이다. 이 길은 단종이 한양을 떠나 영월로 가던 유배길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올랐다는 ‘군등치’와 해를 향해 절을 올렸다는 ‘배일치’ 등 임금의 자취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가 있다. 멀리 서강의 물줄기 너머로 자갈톱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땅으로 작은 배가 오간다. 몇 푼의 삯을 지불하고 배에 오른다. 깊고 푸른 서강을 가로질러 자갈밭에 배를 내렸다. 강은 굵은 호를 그리면서 안쪽에는 자갈을 쌓았고 그 사이로 길을 열었다. 어린 임금에게 청령포는 유배지였다. 임금이 자주 올랐다는 망향단, 어린 임금의 처지와 한탄을 보고 들었다는 관음송, 최근에 새롭게 복원한 단종이 기거하던 집들에서 임금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다. 영월군은 최근에 청령포에다 큰 기와집을 지어 단종이 유배 와 있던 곳을 재현했다. 그런데 왠지 좀 호사스럽다. 단종이 유배와 있던 늦여름 비가 많이 퍼부었나보다. 청령포에 물이 차 올랐다. 서둘러 영월 동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얼마간 머물며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란 애절한 심정을 시로 표현하는 수밖에 달리 일이 없었다. 관풍헌 자규루에 올라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다. 할아버지 세종이 살았을 적엔 집현전 학자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도록 했었고, 총명하고 명석한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대단했었다. 관풍헌에서 유배생활을 할 즈음 금성대군이 다시 경상도 순흥땅(영주)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키다 실패하자 단종은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어린나이로 사사되었다. 전하는 얘기로는 왕명을 받들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관풍헌에 당도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하인 하나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고 하니 1457년 10월 24일의 일이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 17살 어린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내팽개치듯 버려졌다. 누구를 막론하고 단종의 시신에 털끝 하나 옮길 경우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서슬 퍼런 엄명 아래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음력 10월 말이면 동강이 얼어붙는 계절이다. 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는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관에 담고서 10여리 떨어진 동을지산 줄기에 암장한 후 수십 명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어디론지 몸을 숨겨 버렸다.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중종 11년에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각처에 수소문하여 현재의 자리에서 찾아내었다 한다. 1698년(숙종 24)에야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되었고 노산묘는 장릉으로 격상되었다. 엄흥도는 만고의 충신이 되어 장릉에서 단종과 함께 제사를 받는다. 영월땅은 단종의 작은 왕국이다. 단종의 유배행렬에 하늘도 슬퍼해 소나기가 내렸다는 소나기재를 넘으면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은 능을 향해 엎드려 있고, 단종이 꿈에 보았다던 금몽암, 단종을 돌보던 궁녀들이 투신한 낙화암, 사육신과 다른 충신을 모신 창절사, 그리고 단종이 죽은 관풍헌 등 영월 여행의 대부분은 단종과 관련되어 있다. 영월 사람들에게 단종은 죽지 않았다.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그의 죽음에 눈시울을 붉혔을 영월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산신당에는 백마를 탄 단종의 그림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10월도 막바지로 접어들면 장릉의 단풍은 유난히 선명하다. 단풍나무 아래를 뛰어 노는 철없는 아이들에게 어린 임금은 먼 전설속의 사람일 뿐. 가을은 봄보다 빨리 간다. 선명한 단풍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