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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기행(6)>
월악산 절경보며 미륵대원 꿈 꿔

하늘재 이용했던 사람들에게 안식처 역할 돌아오는 길에 수안보 온천서 피로 해소 국토의 70%이상이 산으로 형성된 우리나라는 이곳과 저곳, 이웃과 이웃, 고을과 고을을 오가기 위해서 크든 작든 고개를 넘어야 했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대관령, 설악산을 넘나드는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이 있고, 호남에서 한양으로 접어들던 갈재, 영남에서 한양 가던 문경새재, 이화령, 박달재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와 전설이 구구절절 할 말이 많을 듯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하여도 숨넘어 갈 듯한 엔진소리 들어며 넘어야 했던 수많은 고개들이 시원하게 뚫린 4차선 터널로 무리없이 다니게 되어 애써 고개를 오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뿐 아니라 그곳에 서린 고개의 애환마저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영남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요즘 말로하면 고속도로 번호 1번인 경부고속도로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열린 고개 길이 있으니 하늘재다. 하늘재는 문경시 관음리에서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로 넘나드는 고개다. 옛날에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 물길이었다. 영남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월악산에 이르고 월악산에 닿아 있는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한양의 마포나루까지 시원하게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주로 이용하던 고개가 하늘재였던 것이다.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했다. 이때가 156년이니 가까운 곳의 죽령보다 2년이 앞선다. 즉 신라에서 고구려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넘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또 김유신조에 의하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고구려 보장왕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둘려 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온달>조에는 온달이 전쟁의 나아가며 말하기를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때의 계립령을 지금의 하늘재로 보고 있으며, 한자 이름은 한훤령(寒喧嶺)이다. 하늘과 관계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이름인 한훤령을 쉽게 부르다 보니 하늘재가 되었다는 그곳 촌로들의 이야기다. 하늘재는 조선시대 문경새재가 뚫리기 전만 해도 수많은 세월동안 주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이곳을 넘나들었으며, 행인의 이용이 많으니 흥청거리는 객주집도 여럿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많은 이야기도 있었으리라.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그때다. 날이 어두워 고개를 넘게 되었던 모양이다.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밤, 선비는 다행히도 저만치 실낱같은 불빛을 발견하고 산골 움막으로 찾아들었다. 그런데 선비를 맞는 사람은 소복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여의고 지금 여기서 시묘(侍墓) 중이라고 했다. 인적이 끊긴 산골 외딴 곳.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인의 태도는 매우 의연하면서도 대범했다. 선비의 치근덕거림에 여인은 멋진 제의를 한다. ‘그대가 글줄이나 읽는 선비라면 내가 짓는 글에 올바른 대구(對句)로 짝을 맞춰보라’한다. 여인이 먼저 띄운 운은 ‘結義此夜因綠’이면 - 곧 오늘밤 우리가 인연을 맺는다면- 이에 대해 선비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글솜씨를 발휘하여 갖가지 대구를 붙여 본다. 百年偕老도 붙여보고, 有子有孫 도 붙여 보고 했으나 어떤 구절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선비는 밤새 머리를 짜내 보았으나 결국 ‘故夫鼓益黃泉’-죽은 지아비가 황천에서 운다-라는 정답에는 미치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고 만다. 이 고개 아래에는 미륵대원이라 불리는 큰 절터가 있다. 폐망한 신라를 부둥켜 잡았던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다 이곳에 미륵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으로 들어가 덕주사를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인 것만은 분명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북쪽을 주시하고 있는 불상이 있는 큰 절터다. 월악산 미륵사지라 불린다. 월악산 관광객들이 휘~둘러 보고 훌쩍 떠나버리는 곳이다. 방금 세수한 사람처럼 얼굴만 말끔한 미륵이 있고, 새끼 거북 두 마리가 어미 등에 앙증맞게 붙어 있는 비석받침인 돌거북, 철심이 삐딱하게 박혀 있으나 세월의 무게만은 허술하지 않은 오층석탑, 정감있게 생긴 석등,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커다란 공깃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사원이다. 사원 가운데로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긴 장방형의 터에 층층이 사원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불사(석굴암) 건조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석굴사원의 조영이 많이 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