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육군 만슈타인 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소위로 참전하여 1942년 전사한 나의 아들 게로와 조국을 위하여 전사한 독일 병사들을 위해 나는 이 책을 썼다”라고 징병군인들에 대한 헌사(獻辭)를 적고 있습니다. 롬멜 장군은 1937년 출판한 보병 전술 <Infantry Attack> 서문에 “유럽 동서남북 어디를 가나 조국을 위하여 전사한 독일병사들의 무덤을 볼 수가 있다. 전사한 병사들은 조국이 또 위기에 처할 때는 언제나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달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라고 징병군인들에 대한 헌사(獻辭)를 적고 있습니다. 호사카 작가가 저술한 <쇼와 육군>을 보면,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 육군의 첫 번째 병폐는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한 것에 대한 책임을 아무도 안 졌다”이고 일본 쇼와 육군의 두 번째 병폐는 “직업군인들이 징병군인들을 전투의 주체가 아니고 소모품으로 여겼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6·25 징비록 서문을 보면 “전쟁을 이끌었던 일선의 직업군인 장군들이 문제였다. 먼저 등을 보이며 달아났던 자치관도 많았다. 긴장하면서 전투 채비에 나섰어야 할 직업군인
어느새 저는 60살이 되었습니다. 29살 때, 1990년 4월 하얀 목련이 필 때, 저는 태어난 고향 인천 중구에서 이규원치과를 개원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임플란트가 아직 일반화되지 않아서, 상실된 제2대구치 보철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이 항상 저의 숙제였습니다. 지금은 CT를 찍어서 치조골 상태와 악골조직을 확인하고 나름 실력이 있으신 대부분 치과원장님들은 손쉽게 임플란트 식립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임플란트 치료술식을 배우지를 못해서 못하고, 대신 저의 치과에서 같이 근무하시는 치주전공하신 봉직의 선생님께서 임플란트 하시는 것을 곁눈으로 슬쩍 볼 뿐입니다. 저는 근관치료시에 핸드 파일로 ‘H’파일을 이용했는데, 대구치 3근관을 한번 발수(Pulp Extirpation)하고 나면, 손가락이 얼얼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근관 길이 측정을 위해서 치과용 표준필름을 사용하여 방사선 촬영을 하면, 평소에는 치근단 부분이 잘 찍혀 나오다가, 바쁜 날은 2~3장을 찍어도 콘 컷으로 치근단을 못 보게 되어 속으로만 화가 나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때는 제가 30대여서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자주 냈던 것으로 기억이 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