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절기를 지나면서 마음 급한 벚나무잎이 벌써 누렇게 물들고 있다. 바람의 결도 다르고 살갗에 와닿는 햇빛의 느낌도 사뭇 다르다. 시인 문성해가 “내 머리에 바늘구멍 뚫는 소리/빽빽하게 들어찬 실뭉치들 들쑤시다/꼭꼭 숨은 실 끝 하나 찾아 들어올리는 소리”라고 노래하던 매미 소리도 이제는 잦아들고 있다.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며 물러가는 여름에게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다만 왜 사람들은 ‘봄날은 간다’ 류의 유장한 노래를 지으면서도 ‘여름날은 간다’는 노래는 지어 부르지 않는지 궁금할 뿐이다.낙화착실종추성(落花着實終秋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화려한 꽃시절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꽃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가을은 열매와 더불어 온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다. 꽃처럼 피어나는 봄날, 무장 무장 생명이 자라나는 여름날, 생명의 기운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내면의 빛을 드러내는 가을날, 허장성세를 다 떨치고 자기의 본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겨울날. 어느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히브리의 지혜자인 ‘코헬렛’은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고 말했다. 아름다운 삶이란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까? 선뜻 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착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것 같지요. 착함을 한문으로 善이라고 보면, 착함은 좋은 것, 옳은 것이 될테고, 그 반대는 나쁜 것, 잘못된 것, 惡한 것이 되겠네요. 그렇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 것일까요?지금 계절이 무엇이냐 물으면 여름이라 할테지요. 입추가 지났으니 가을이라고 제법 주밀한 답을 하는 이도 있을겁니다. 정말 그래요? 내가 옳다고 알고 있는 그 답이 맞나요? 6~8월은 다 여름인가요? 지금 남반구의 나라들은 겨울이 한창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겨울에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는 맞고 다른 어느 곳에서는 틀립니다. 여름에 산타를 만나는 곳도 있습니다. 방향도 그렇습니다. 그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 입장에서 동쪽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지점이 누군가에게는 서쪽이거나 북쪽일수 있습니다. 기준을 자신에게 놓고 그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 기준점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사실 모든 지역,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모든 단체를 망라하여 무엇은 절대적으로 옳고, 무엇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우리는 살인은 절대적으로 악한
요즘은 틈이 날 때마다 집 근처에 생긴 공원을 산책하는 게 낙 가운데 하나이다. 이름하여 경의선숲길이다. 경의선이 지하화되면서 철길 부지에 공원이 조성된 것이다. 길이는 길고 폭은 좁다.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니 공원화 사업이 완료되면 도심 속에서 제법 괜찮은 산책로가 하나 생기게 된다. 흰말채나무, 물푸레, 칠엽수, 이팝나무, 양버즘, 양버들, 야광나무, 덜꿩나무, 가죽나무, 뽕나무, 모감주, 남천 등의 나무와 병꽃, 수호초, 은쑥, 갯쑥부쟁이, 줄사철 등의 키작은 풀꽃들과 눈맞춤하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다. 저녁이 되면 인근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공원에 나와 산책을 한다. 유모차에 탄 아기들,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아빠를 앞질러 재우쳐 달리다가 자랑스럽게 되돌아오곤 하는 아이들, 운동 삼아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사람들, 급할 게 뭐 있느냐는 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심지어는 토끼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있다. 공놀이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도 보인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이런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 수밖에 없
요즘 제가 사는 집에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이는 토끼입니다. 털색이 가을빛이어서 붙여준 이름이지요. 올해 초, 공원 테니스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작년쯤부터 공원에 나타난 몇 마리 토끼들로 인해 공원 가는 즐거움이 무량했습니다. 가을이의 엄마는 유독 저를 따랐습니다. 그런 엄마가 4월 어느날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하루 이틀 지날때마다 함께 지내던 토끼들도 한 마리씩 없어지고 급기야 그 어린 가을이만 달랑 남았습니다. 그들을 보는 기쁨에 공원을 즐겨찾던 누구도 행방을 아는 이 없었습니다. 공원에 돌아다니는 오소리나 너구리의 소행일 거라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가을이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어린 가을이는 밤이면 테니스장 밖으로 나왔다가 사람들을 보면 겁에 질려 재빠르게 도망쳤습니다. 먹이를 주며 다가가도 경계하느라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가을이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공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진심으로 마음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엄마 아빠를 잃고 얼마나 슬프고 두렵고 막막할 것인지를 읽어주었습니다. 몇일간 홀로 용감하게 살아남아준 것을 칭찬하고 격려했고 앞으로 잘 보살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조심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길거리를 떠돌며 살고 있는 이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는다. 높은 권위의 보좌를 버리고 평범한 사람들 곁에 다가서는 그의 태도는 종교적 권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중들에게 온유하고 따뜻한 모습으로만 자기를 각인시키려 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는 불의와 어둠에 대해서 그는 조금의 유보도 없이 직정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최근 토리노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던 그는 무기를 만들거나 무기 산업에 투자하면서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진짜 관심은 돈벌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지만 그렇게 기탄없이 말하기는 어렵다. 좌고우면하느라 마땅히 해야 할 말도 못하며 사는 내게는 경이롭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는 두루뭉수리로 말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누군가의 삶 혹은 삶의 자세를 뒤흔들거나 타격하여 충격을 가
피카소의 그림은 어렵다. 보면 바로 이해가 되는 그림이 아니다.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피카소 그림과 같이 난해한 머릿속 그림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자기 머리에 떠오른 그림, 즉 생각을 중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말을 하고 행동한다.휠체어에 의지하시는 연로한 부모님께 추억을 쌓아드리자고 우리 자매들은 서로 맞추기 힘든 시간을 내어 효도여행을 다녀왔다. 두 분의 병수발과 함께 먹고 자는 일에 관련된 일들이며 유익한 프로그램이며 운전 등 신경써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만나면 서로 알아서 척척 일이 될 것이라 여겼던 내 생각은 그냥 내생각이었다. 내 눈에는 이 상황에서는, 그리고 다음엔 무엇을 해야할지가 훤히 보이는데 다른 자매님들은 그냥 여행 온 사람들처럼 대접만 받는것 같았다. 눈짓을 해도 굼뜨게 움직이거나 왜 하냐고 반문할 때는 답답함에 인상이 일그러졌다. 내게 생각이,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 그것이 저 사람의 머리에 같이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 정도는 보여져야 하는것 아닌가? 왜 안보여? 하는 비난의 마음이 섞여서 말이다. 내게 떠오른 생각은, 내게만 보이는, 다른 사람의 머리에는 전혀 없는 미지의 세
칠십대 초중반의 사내들 넷이 모이니 차 안이 시끌벅적했다. 모처럼의 나들이가 흥겨웠기 때문일까. 평소에 과묵하던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 비슷한 또래가 모이니 자연스레 대화의 태반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는 데 할애되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해방 전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숨가쁘게 살아가는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유년시절이 호출되자, 마치 잿더미 속에서 불씨를 찾아내듯이 그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난하고 힘겨웠던 시기였지만 그리움으로 상기되니 정채(精彩)를 띠게 되었다.누가 오정포(午正砲, 낮 열 두 시를 알리기 위해 쏘던 포)를 쏘던 장소를 떠올리면, 다른 이는 그 옆에 있던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에 편입된 군부대 막사를 떠올리고. 누가 효창공원으로 피난을 갔던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이는 B29 폭격기가 용산역을 폭격해 객차가 하늘로 떠오르던 이야기로 받고,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비닐 포대를 타고 눈길을 재우쳐 내리닫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사람이 재강(술찌끼)을 먹고 취해 비틀거렸던 경험을 이야기하면 다른 이들은 녹두국물을 얻어먹곤 했던 어느 공장을 떠올렸다. 녹두국물 이야기는 다꽝(단무지) 공장 이야기로, 원효로
공원 공터에서 쑥이나 봄나물을 캐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사실 그다지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분들을 그냥 아주머니로 볼 때는 그랬다. 그러나 누군가의 어머니로 보았을때 그 행위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머니들’이라고 읽었을때는 ‘개념없음’이나 ‘무조건 취하고 보는 욕심’의 행동으로 해석했었고, 그래서 별로였다. 어느순간 아주머니를 누군가의 어머니로 바꿔 생각하자 그 행위는 가족에 대한 사랑, 혹은 거룩함으로도 읽혀졌다. 그런 어머니들의 행동은 자신의 이미지관리 차원을 넘어서 있다. 먹여살림의 거룩하고 절박한 몸짓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기관리가 우선이었다면, 역으로 지구상의 모든 가족과 자녀들의 이미지는 엉망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확대해석을 해본다. 자신은 어떻게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머니들이란 곧 우리가 보기 좋지 않게 여기는 아주머니들의 또다른 얼굴인것 같다.이쯤에서, 서울에서 대학원과정을 밟고 있을때 한번씩 올라오셨던 우리 어머니가 떠오른다. 오실 때마다 인절미를 해서 양손에 한보따리씩 싸든 채 뒤뚱뒤뚱 버스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볼때면 퍽 유쾌하지 않았다. 그것을 내가 들어야 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무거운 것 들고 다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시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속수무책이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와줄 이 하나 없는 암담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선원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시인은 바람과 물결에 시달리던 선원들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자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한다. 이 구절을 반복하여 읽으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은 현실 속에서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일렁이는 바다 물결 속에서 속절없이 죽어간 이들이 떠오른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그리고 내전에 가까운 상황에 내몰려 자유의 새 땅에 당도할 희망을 품고 리비아 해안을 떠났던 700여 명의 아프리카 난민들 말이다. 희망의 여정은 죽음으로의 항해가 되었다. 도움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다. 검푸른 바닷물결 속에서 기적같은 도움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절망을 떠올리니 숨이 막힌다. 절망의 바다는
외롭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용을 내고 친구를 빌려쓰는 ‘프렌드 렌탈’ 상품의 등장은 참 서글픈 우리시대 자화상입니다. 이성간에도, 집안에서도, 어느 작은 모임에서도 외톨이 된 느낌이 들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오지 않거나 자꾸 자리를 뜬다면 주밀한 자기점검이 필요합니다. 걸핏하면 자기 얘기, 자기 자랑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모든 화제를 기-승-전-자기자랑으로 끌어가는 것이 혹 내 얘기는 아닌가! 듣는척만 하면서 대충 흘려듣는다거나, 끼어들 타이밍만 보거나, 빨리 말을 좀 끝내줬으면 하는 잡념으로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면, 설령 세련된 청취의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해도 공감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자기자랑 한다고 남들이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남들을 들러리나, 자기 아래로 보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는 귀신같이 느끼고 자리를 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하는 자기자랑이 문제입니다. 상대를 나보다 낮게 보지 않으면서 하는 자기자랑은 좀 다릅니다. ‘나는 원래 잘해’ 하는데도 상처받기 보다는 귀엽고 순수하고 경쾌하게 느껴집니다. 침울한 기운으로 자기표현 안하는 사람들보다 이런 이들이 더 인기가 있기도 합니다. 친구를,
한밤중에 무지근한 어깨 통증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잠들기 어렵다. 어깨를 주물러도 보고 자세를 바꿔보기도 하지만 통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곁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와 몸을 풀어보기도 한다.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은 통증을 “조직에 생긴 손상과 관련된 불쾌한 느낌”이라고 정의하는 한편 통증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해로운 물질로부터 물러나게 해서 생물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한편 환자에게는 치유과정에 필요한 휴식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휴식을 보장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가끔 병원에 입원한 이들에게 위로의 말이랍시고 “지금까지 쉼없이 달려왔으니 강제로 부과된 이 휴식 시간을 통해 깊어지시라”고 말하기도 한다.고통 혹은 통증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한센병 환자였던 시인 한하운이다. 그는 나병 확진을 받고 소록도를 향해 걸어가던 자기 경험을 ‘全羅道길’이라는 시에 담았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숨막히는 더위뿐이라/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붉은 황토길은 아득하고 암담한 시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숨막히는 더위는 중의적이다. 날씨가 덥다는 뜻도 있지만, 벗어던질 수 없는 구속복에 채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