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즐겨보는 예능프로그램에서 개그맨 김수용씨가 외국공항에서 있었던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공항장애’라는 표현이 우스갯소리로 나왔던 것을 보았다. 이 방송을 보고 문득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2006년 본과 2학년 겨울 방학 때 외국 치과대학과 교환학생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캐나다 UBC 치과대학을 4박 5일 일정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 두 분과 나를 포함한 동기 5~6명이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첫 해외여행이라는 설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평소 영어울렁증이 심한편이라 두려운 마음도 가진 채 비행기에 올랐다. 10시간이 넘는 긴 시간의 비행 후 벤쿠버 공항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입국심사였다. 당시 나는 장시간의 비행으로 떡진 머리를 감추고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캐나다 여행기간 동안 애용할 컵라면으로 가득 찬 빨간 비닐 봉다리를 들고 입국심사라인에서 내 차례만 오기를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내 차례. 푸른 눈의 입국심사관이 나에게 빠른 말투로 뭐라고 솰라솰라하고 정신없이 말하는데 감으로 캐나다에 온 목적이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다른 일행들은 교환학생으로 온 거라고 대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던 나는 과식 때문에 체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내 배가 아플 때마다 항상 어머니는 단조로운 멜로디의 “엄마 손은 약손, 우리 아들 배는 똥배”라는 노래를 부르시며 아픈 내 배를 어루만져 주셨다. 어머니의 손이 배에 닿으면 거짓말처럼 배 아픔이 사라지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잠들 수 있었다. 어릴 적 내 배를 어루만져 주시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은 정말 배를 낫게 하는 힘이 있었고 나는 그렇게 믿고 유년기를 보냈다. 중, 고등학교를 들어가자 나에게도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가 찾아왔다. 부모님보다는 친구들이 좋던 그 시절, 나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하던 학창시절에는 배가 아플 때마다 어머니의 손을 찾기보다 집안 상비약통에 들어있던 소화제를 찾아먹거나, 학교 보건실에서 소화제를 구해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흥겨운 멜로디와 함께 어릴 적 추억으로 잊혀져가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서울 집에서 떨어진 전주로 대학에 입학해 엄마의 따뜻한 손길과는 더욱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엄마 손은
어느덧 인생의 초가을쯤,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나. 화사한 봄 햇살같이 나에게도 봄이라 불릴만한 시기가 있었다. 사촌들까지 오빠만 9명인 딸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며 부러울 것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온 나는 어릴 적 엄마, 아빠가 만들어 주셨던 김밥이 그리도 맛있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갈라치면 왜 꼭 비가 왔을까. 소풍 때면 아빠와 엄마는 새벽부터 뽀얀 흰 쌀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참기름과 씹을 때마다 톡톡 터지는 깨소금을 듬뿍 넣고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맛있게 비벼내셨다. 까만 김 위에 양념한 밥 한 덩이를 척 얹어 두툼하게 썬 단무지, 소시지, 달걀, 오이. 사실 오이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가끔 다투셨다. 엄마는 시금치가 쉬면 탈난다고 오이를 넣자고 주장하셨고, 아빠는 맛이 떨어지니까 그래도 시금치를 고집하셨다. 아마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탈나는 게, 맛없게 김밥을 먹는 게 싫었던 두 분의 다르지만, 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 시절에 귀했던 쇠고기는 미리 정육점에서 김밥에 넣기 좋게 썰어서 준비를 하셨다. 그 시절에는 게맛살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우엉을 넣어주신 적도 있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대표원장으로 진료를 하고 계시는 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중국치과에서 강의를 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직원들 대상으로 부탁을 하셔서 “중국어 못 하는데요”라고 했더니 거의 조선족과 한족인데 한국말로 해도 다 알아듣는다고…. 2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으로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대국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지방 공항보다도 작은 규모였고 도시 분위기도 한글간판으로 중국이 아닌 지방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마중 나온 직원의 차로 병원에 도착하여 그룹 대표님과 인사를 나누고 병원 경영을 맡아 운영하시는 원장님과 긴 시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이나 중국.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은 듯 고민도 별반 다르지 않고 직원들 이직률과 주인의식이다. 그래서 첫 번째 강의 주제는 뚜렷한 직업의식과 비전을 갖게 하기 위해 필자의 한 치과에서 26년간 근속하면서 느꼈던 것과 경험들, 그리고 한국치과의 문화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고, 두 번째 강의는 외부에 다른 치과도 함께 들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상담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중국의 치과 구조는 우리나라 시스템과는 좀 다르게 치료와 상담, 환자관리 등 모
올해도 어김 없이 봄이 왔습니다. 올 봄은 정말로 많이 기다려진 봄입니다. 워낙 어둡고 답답한 겨울이 길었기 때문이겠지요. 혹시 이런 제목의 글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봄은 다시 온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꿈을 꾸며 지냅니다. 꿈도 거창하게 ‘대통령이 되어서 이 세상을 한번 휘어 잡고 싶다’라는 거대한 꿈도 꿔 봅니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지만, 꿈을 꾼다는 것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꿈이 있기 때문에 힘든 줄 모르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군가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만, 수 천 년의 인류의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무너진 꿈들이 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꿈을 꾸며 삽니다. 참 묘한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수년 전, 보스턴의 하버드대학을 견학한 적이 있습니다. 에듀베리 교육연구소의 조우석 소장이 유학중이었는데, 그의 안내를 받으며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을 한 번 둘러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것이 저의 머리 속에 가득했던 이유는, 저도 더 행복해지고
동무동무 씨동무 이야깃길로 가아자 옛날 옛날 옛적에 간날 간날 간적에 아기자기 재미나는 이야깃길로 가아자 박목월 시인의 이야깃길 이라는 동시다. 어릴 때 많이 불렀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터인가 이 ‘동무’란 말이 남한에서는 사라졌다. 아마 해방 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영어의 comrade란 말을 순우리말로 동무라 하면서 쓰니까 공산당 말로 인식되어 남한에서는 안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공산주의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에서 동무란 말을 쓰는 것 같은데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북한이 그 예이다. 그 대신 현재 남한에서는 한자어인 친구, 순우리말인 벗 등이 많이 쓰여진다. 그러나 순우리말인 동무란 말은 해방전 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많이 쓰여왔다. 가곡 동무생각, 고향생각, 가고파 등에서도 동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5·16후 내가 어릴 땐 동무란 말을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간첩이라고 순경이 잡아가는 줄 알았다. 동무가 곧 공산당으로 인식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가면서 서서히 순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여러 순우리말을 찾아보고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동무란 말이 참 정다운 순우리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동무라는
얼마 전 제 모교의 2017년 신입생 선발에서 일차 지원자가 정원보다 적은 미달사태가 발생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치과 대학의 인기가 많이 줄었다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관찰되어 왔다고 들었습니다. 치과 대학이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과가 된지 오래라고 합니다. 제 주변에 물어보아도 치과의사가 직업으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문 듯 합니다. 본인은 그럭저럭 만족하고 산다는 친구들도 자식을 치과의사 시키기는 싫다고 합니다. 저희 때에는 부모가 치과의사인 친구들이 꽤 있는데 그에 비하면 치과의사로 살기가 분명 어려워진 거 같습니다. 치과의사가 직업으로서 좋지 못한 이유를 물어 보면 대체로 대답은 비슷합니다. 치과의사의 공급 과잉으로 인한 빡빡한 개원 환경을 그 이유로 제일 많이 듭니다. 주변에 치과가 워낙 많고, 저수가와 과잉경쟁 등으로 인해 동네 치과의사로 살아 남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치료를 하는 의사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개인 사업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듭니다. 진료를 마치면 세무, 회계, 노무 등의 해야 할 일이
오늘도 진료실에 들어서면서 계단을 밟았다. 아마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계단을 밟지 않을까 싶다. 일상에서의 계단은 그저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에서 위로 공간적 이동에 필요한 수단일 것이다. 물론 우리의 생활 동선을 따라가 보면 수직적 계단 이외에도 수평적 계단도 있겠다. 나는 휘감아 도는 계단을 상상하고 어지럼증을 느낄 때도 있고 엉키고 뒤틀린 계단이 눈앞에서 떠오르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계단은 여러 가지 색깔을 입은 채로 하늘에서 쏟아지기도 하고 빙빙 돌기도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고 이어진 계단의 이미지도 떠오르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란스러운 계단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붉은색으로, 푸른색으로, 또는 색동옷을 입은 것처럼 하늘에서, 구름에서, 연처럼, 면류관처럼, 땅에서, 똬리를 튼 뱀처럼, 자갈밭처럼,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자궁 속처럼 계단이 나타난다. 환각의 상태다. 환각의 계단들은 정열로, 슬픔으로, 기쁨으로 다가온다. 혼돈이다. 참 모호하고 애매함을 계단이 갖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모습을 드러낸 계단이 아니고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물론 나의 머릿속의 계단의 이미지가 복합적인 구
작년에 환갑이 지났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어서는 생각지도 않게 좋은 점들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기억력이 떨어져 가슴에 대못이 박혔던 그 쓰디쓴 고통조차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더 편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어귀가 마음에 절절이 와 닿는다. 쇠락해져가는 기억력을 한탄하며 가슴 아파 한 적도 있었으니 이제는 기억이 안 나면 필요 없는 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만다. 내게 나쁜 짓하고, 못된 짓 하고, 가슴에 상처를 준 사람들조차도 잊혀져 오히려 편하다. 나이가 들다보니, 술이 약해졌다. 취한 후 기분에 술집 바꿔 가며 밤새 마셨던 술이건만, 요즈음은 취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돌아다닐 기분도 나지 않아 빨리 집으로 갈 생각만 한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일하는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 머릿속에 각인되어서 취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이기심이 발동한다. 다음날 술이 깬다해도 그 후유증이 사흘은 간다. 정신집중이 안되어 일이 힘들어지다 보니 술 생각이 자꾸 사라진다. 남들이 일생 마실 술을 40대까지 이미 다 마셔버린 듯하고, 담배도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하루에 두 세갑 피워댔고 남들이 일생 피울 정
나는 따뜻한 남쪽 부산에서 수련생활을 하고 있는 전공의이다. 고향이 부산이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는 강원도 소재의 유일한 치과대학, 강릉원주대학교 치과대학이다. 우리나라 지도의 저 먼 아래쪽 끝 부산에서 20년간 살아온 나에게 강원도는 실로 미지의 땅이었다. 사실 면접을 볼 때만 해도 그냥 여행 삼아 가 보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어쩌다 보니 합격을 하게 되었고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여 이곳 강원도에서 길고도 짧은 6년간의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굉장히 낯설었다. 날짜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개강 첫날인 3월 초였을 것이다. 대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하는데, 어느 순간 스르르 눈발이 날리더니 30분도 안 되어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이는 것이었다. 눈이 잘 오지도 않을뿐더러, 눈이 내리더라도 가루처럼 풀풀 날리면서 땅에 닿자마자 녹는 장면만 익숙하게 봐 왔던 나에게 이는 실로 충격적인 경험이었기에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이때까지 지내왔던 따뜻한 나라와는 정말로 다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눈 얘기를 할 것이 참 많다. 학교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태백산맥 줄기의 정상 근처에는 5월까지도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는데, 우리
봄꽃 중에 목련을 가장 좋아한다. 목련 중에서도 새하얀 백목련이 좋다. 매끈한 목련의 꽃잎이 치과의사들의 흰 가운을 연상시켜서만은 아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꽃망울을 터뜨려 고귀함을 자랑하는 목련은 마치 힘겨운 학생 시절을 이겨내고 세상에 나온 새내기 의사들을 많이 닮았다. 카빙, 넘버링, 토마스 실습(모형 마네킹 이름), 임상 실습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학생 시절 겪은 일들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국가고시 준비였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인내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목련이 더 아름답게 보이듯, 쉽지 않았던 4년의 여정을 마친 후 받은 치과의사 면허는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원내생’이라는 타이틀을 벗고 ‘새내기 치과의사’가 되니, 내가 준비가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눈이 녹지 않아도 봄을 맞이하는 목련처럼,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세상에 툭 튀어나온 기분이다. 치과대학 입학 당시에는 4년이 지나면 존경하는 선배님들처럼 멋진 치과의사가 되어 있으리라 꿈꾸었다. 일단 졸업만 한다면 정말 멋진 치과의사가 되어 크라운 프렙도 완벽하게 하고 진단도 척척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졸업 후 면허를 받은 내 모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