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이 무엇인지를 요즘 확실히 경험하고 산다. 벌써 6개월째다. 지인에게서 구피라는 아주 조그마한 열대어를 선물받은 후 일어난 현상이다. 다 자라봐야 손가락 한마디 남짓한 크기에 치마처럼 화려한 꼬리를 가진 구피는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애틋한 대상이다. 길을 걷다 멈춰있던 자동차의 출발하는 모습에서 구피의 움직임을 연상하는 일은 다반사다. 같은 자세로 오랜 시간 관람한 대가로 어깨가 안 움직여 한의원을 찾아 침 맛을 봐야 했던 일, 너무 안력을 써서 들여다보는 바람에 눈이 뻑뻑하여 안과를 찾았던 일 등 웃지못할 중독의 후유증들을 맛보아 왔다. 우리집 구피들은 깨어있는 동안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양 분주히 움직인다. 그래봤자 행동패턴은 몇 안된다. 먹고 연애하고 싸우고 자는 일이다.먹이반응은 신기하고도 재미가 있다. 배가 부르면 누가 지나가든 아무 관심도 없다가 배고플 시간쯤 되면 앞을 지나다니기가 미안할 정도로 이리저리 내 눈치를 보며 모여든다. 내 위대한 존재감이 빛을 발하는 유일한 순간이라 일부러 왔다갔다 장난을 쳐보기도 한다. 이들의 연애는 도가 지나치리만치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기가 높은 암컷은 서너마리의 수컷이 몰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박두진의 ‘해야 솟아라’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이런 시구를 얻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새롭게 된 시간’이다. 누추하고 던적스러운 일상에 지친 이들은 시간이 새롭게 갱신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주기적으로 갱신하기 위해 마디를 만들었고, 새해도 그 마디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대형 건물에 내걸려 유명해진 반칠환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는 시간이 왜 위대한 갱신자인지를 이렇게 보여준다.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삶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새해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당도한다. 하지만 새해가 되어 달력을 바꿔 걸고, 수첩을 바꾸고, 전화번호부를 정리해 보아도 삶이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삶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객관적으로 계측 가능한 시간인 크로노스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시간인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아무리
무엇인가 정리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시기입니다. 주말이나 월말과는 다른 차원의 성찰이 연말에 주로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진짜 다른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연초에 작심한 조목들은 해마다 패배감만 더해놓고 멀어져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앞으로만 달리던 호흡을 늦추고 마음의 정리정돈을 해야할 시간입니다. 정리란,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입니다. 정돈이란, 흩어져 있는 것들을 제자리를 찾아 가지런히 둔다는 뜻입니다. 쓰레기는 정리해야지 정돈하지 않습니다. 주변 환경이나 일도 그렇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마음의 정리정돈을 잘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있어 정리란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할 생각들, 감정들을 버리고 없애는 것이고, 정돈이란 제대로 정신차려 사는 것입니다. 정리해야 할 대표적인 마음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망이나 증오심을 품고 살 때 그 가장 큰 피해자가 자기 자신이란걸 우리는 잘 알면서도 바보같이 깜빡하고 삽니다. 나의 잘못이든 저쪽의 잘못이든 먼저 손내밀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도, 자존심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참으
일주일에 하루, 새벽 기상 시간에 매이지 않기로 한 월요일 아침, 모처럼의 숙면을 꿈꿨지만 몸에 내장된 기억은 의지보다 강했다. 어김없이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도 침대 속에서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가며 30분 쯤 뒹굴거리는 호사를 누렸다. 아내가 아침 6시만 되면 트는 FM 라디오 방송을 대신 틀고, 아침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속으로 ‘지금 이곳이 참 낯설다’ 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존 레논의 ‘이매진’이었다.“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하려고만 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죠. 저 아래 지옥이 없고, 저 위로 푸른 하늘만 있을 뿐.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봐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죠. 죽일 일도 목숨을 바쳐야 할 일도 없고, 종교도 없을 거예요.”노래는 이어졌다. 존 레논이 달콤한 목소리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그건 나 혼자만의 꿈은 아니라고, 당신도 그 꿈에 동참하라고 말할 때 가슴이 뭉클해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홉스의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나날이다. 드라마틱한 일
내가 불교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10년 전만 해도 ‘불교’ 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인도불교나 중국불교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달라이라마로 대표되는 ‘티베트불교’가 기존의 불교국가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티베트불교가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불교’라고 해야 옳겠다. 미국불교는 21세기 불교사의 큰 이변으로 간주될 만큼 현재 미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심리 및 정신적 치유와 함께 현대인의 중요한 정신적 가르침으로 그들 속에 고요히 스며들고 있다. 언젠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 공항에서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진 웬 서양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영어가 젬병인 나는 손짓과 표정을 동반한 바디랭귀지(Body Language)와 필담(筆談)을 주고받으며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정신적인 치유를 위해 동양, 그 중에서도 일본을 찾아와 남쪽부터 북쪽까지 보름 동안 돌아다녔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자신이 찾고 있는 가르침을 발견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허탈하게 공항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수행자로 보이는 여성출가자가 눈앞에 앉아 있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진리
선물로 받은 다운점퍼가 거짓말 조금 보태 종이 한 장 든 것처럼 가볍다. 게다가 부드러운 촉감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품질도 좋아서 손이가는 애용 1순위다. 옷이건 신발이건 노트북이건 보다 더 가벼우면서 성능은 최고로 만드는 것이 각 업체들의 화두다. 초경량 고성능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초경량 마음은 곧 고성능과 직결된다. 행복과 불행의 결정적 요인이 마음의 무게다. 최대한 비우고 가벼워야 행복하고 능력있고 자유롭게 된다. 마음속에 넣고 다니는 불필요한 것들을 빨리 비우는 사람이 초경량의 마음을 갖게 된다. 걱정, 섭섭, 고민, 미움, 질투, 불안, 자만, 자책 등이 마음을 무겁게 하며 능력을 저하시킨다. 마음을 초경량 최고성능이 되게 하려면 화나고 불쾌하게 하는 상황에 바로 응하지 말고 일단 숨을 돌려 틈을 만드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해 후회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을때 더 오래 후회하게 된다. 바로 대응하지 않으면 공간이 생기고 차츰 상황이 가벼워진다. 고승들, 위인들은 유머의 달인들이기도 하다. 유머는 모든 심각한 것들을 가볍게 해체시키는 힘이 있다.
뒤늦게 살림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내가 수술을 받고 자리에 누운 후, 30여 년간 거의 독점적으로 수행해오던 아내의 살림이 내 차지가 되었다. 아내는 허둥거리는 남편을 보며 옆에서 혀를 차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초보 주부이니 말이다. 바깥 일이 분주하다는 핑계 하에 청소나 설거지 등에만 한정했던 나의 역할이 확장되자 몸은 바빠졌지만 마음은 여러 모로 즐겁다.그동안 차려진 음식만 무심히 허겁지겁 먹던 처지인지라, 음식을 만드는 일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시행착오를 겪곤 한다. 신 김치를 활용해 찌개를 끓일 때 매실 엑기스나 설탕을 조금 가미해야 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나는 비의를 전수받는 도제처럼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찜기를 이용해 고구마를 삶거나 채소를 데칠 때 바닥 물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울 때에는 물을 조금 뿌려주어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도 배우고 있다. 상을 차릴 때도 찬 음식을 먼저 내놓고 그 후에 덥히거나 끓이는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는 것을 시행착오 끝에 익혔다.직접 상을 차리다보니 음식 먹음이 곧 하늘을 모시는 일임을 알 것 같았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은 ‘쌀 한 톨의 무게’가
원 영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내 주위에는 결혼을 하지 않은 커리어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옛날 같으면 뭔가 문제가 있어서 결혼이 늦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가 각 분야에서 상당한 커리어를 지닌 여성들이어서 오히려 더 당당하고 멋있어 보인다.하루는 이 가운데 한 친구가 자기 친구라며 데리고 와서는 내게 상담요청을 했다. 자기 친구가 3년째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현재 결혼 얘기까지 오가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너무 좋은 일이라며 얘기를 듣자마자 얼른 축하해 주었는데, 말하는 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고 보니, 너무도 아픈 상처가 있었다. 내가 듣기에도 이성의 스킨십을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과거였다. 그녀는 여고시절 겪었던 한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했다. 실제로 그 사건은 그녀의 성격, 대인관계, 사회생활 등 일상의 모든 것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지금도 인생의 반려자 앞에서 또 다시 높은 벽을 치고 있었다. 그런 아픈 경험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밝고 아름답게 살았을 텐데, 그 잔인했던 기억의 저편에서 그녀는 꿈쩍 않고 아파하고 있었다.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숨이 났다
다 정상입니다 장오성 교무 원불교 송도교당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와 말이 평상시에 물에 빠지면 말이 훨씬 잘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큰 홍수가 나서 물살이 거셀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말은 그 흐름을 거슬러가려고 용을 씁니다. 죽을 힘을 다해 1m 전진했다가 다시 밀려서 1m 떠내려가기를 반복하다보면 결국 탈진해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익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 소는 물의 흐름을 타고 계속 강가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면서 떠내려갑니다. 거의 땅에 가까워지면 발을 디뎌서 있는 힘을 다해 물에서 빠져나온다고 합니다. 거센 물의 흐름따라 2~3킬로미터를 떠내려가다가 결국 살아서 나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순리에 맡겨두고 정신만 깨어있으면 새로운 살길이 열리고 더 나은 목초지가 나타날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삶은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철든 사람입니다. 아무리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시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마음의 태도는 잘나가던 지난 날, 왕년(往年)을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잘나가던 그때를 항상 자
종교 칼럼 어느 날 광장에서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저녁 8시가 가까워 오자 서울역 광장 북쪽 한 모퉁이에서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장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저마다 손가방이나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아무도 지시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연주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원을 이루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은 점점 커졌다. 바이올린 한 대가 더 합세하여 두 대가 되었다. 한 연주자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자 다른 연주자가 화음으로 화답했다. 모여 선 이들은 너나없이 합창대가 되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루한 차림의 노숙인들이 하나 둘 슬그머니 다가와 노래에 동참했다. 광장은 졸지에 음악회장이 되었다. 플래시 몹을 변형한 홀리 몹 행사였다. 어떤 분이 추분이 지난 후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는데도 여름옷을 입고 지내는 서울역 노숙인들을 딱하게 여겨 그들에게 따뜻한 옷을 전달하자는 취지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누가 동원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인 개인들이었다. 낯익은 얼굴도 더러 보였지만 대개는 낯선 이들이었다. 함께 부른 노래 몇 곡은 그 자리에 동
직장을 떠날 때의 예의 원 영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 하루하루 살다보면, 내 인생이 쳇바퀴처럼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아서 그날이 다 그날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출근했다 싶은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있고, 회의 한 두 차례 하고나면 벌써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시간은 왜 이리도 잘 가는지 숨이 턱까지 찬다. 그것이 급속한 경제성장의 막대그래프를 만들어내는 바쁜 직장인의 하루다. 스님이 되고도 나는 직장생활을 한다. 물론 일반인들과는 다른 직장이다. 예전엔 불교학을 연구하는 연구소에 3년쯤 일했고,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매일 아침이면 방송도 한다. 그래서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2년 전에 연구소를 그만둘 때 일이다.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사건사고가 귓가에 들려왔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입을 닫고, 귀를 막았다. 떠나는 순간까지 왈가왈부하기 싫었다. 직장을 떠날 때에도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직장을 떠나고 싶을 때에는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본다. 성급하게 화부터 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