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던 진실·방황·희망을 적고 싶다
내 삶이 보편타당한 일상임을 얘기하고 싶다
“나는 18살이다. 나는 000이다. 나는 1만8천원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CF속의 독백이다.
어느 가수가 흉내내듯 나도 나직이 내뱉어 본다. “나는 서른 둘이다. 나는 386이다. 나는
삼만이천원이다!”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십대 때는 한창 인기있던 배우를 좋아해서 브로마이드다
사진첩이다 용돈을 쪼개 사 모았다. 이십대 때는 사정상(?) 별로 즐기고 노는 것 없이 그냥
떠 밀리듯 학교 졸업하고, 이십대 후반에 가서야 세상에 내던져진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어린시절, 학창시절이 그리웠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허허벌판의 소나무처럼 그렇게 곧고
푸르게만 서 있고 싶었다.
이제 나는 삼십대 초반, 옛날 같으면 인생 60의 반을 살았으니 시부모에 자식에 인생사에
궁금한 나인데 아직도 어린애 같다는 소리도 가끔 듣는 철부지 노처녀인 모양이다. 한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말고는 글을 쓰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영어, 수학 점수보다는 국어 점수가 나았고 굳이 국어라는 과목보다는 책
읽고, 책방에 가서 책 고르고, 시간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 사이에 틀어 박혀 있고 하던 일
자체가 좋았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문예반에 들어가서 글을 쓴 것도 아니었다. 입시가 뭔지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꾸준히 써오던 일기도 고2때 놓아버렸으니….
돌이켜보면 글 써서 받은 상이랍시고 종이 몇조각 가지고 너무 나 자신을 문학소녀로
밀어부치지 않았나도 싶다.
언젠가 대학시절 한 학년에 부원 한명뿐인 편집실의 실장일 때 모 교수님께서 글을 부탁한
적이 있는데 이런 말씀을 들었다. "글은 아무나 쓰는게 아니다. 어떤 이는 펜을 잡기조차
힘든 사람도 있다"고 그랬다. 내가 그랬다. 한동안, 아니 솔직히 중학교 때 일기 빼놓고
가끔씩 남에게 나를 표현한답시고 원고지 몇장 채운 글 빼고는 글을 쓴 적이 없다. 써보려고
노력도 안했다. 늘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원고지도(참고로 나는 아직 컴맹이다)
펜도 준비없이 신세타령만 했었다. 소재가 없니 생각이 정리가 안되니 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면 다 시인이 된다고 한다.
나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지만 사랑보다는 동경이었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랄까
어쨌든 그 때 적은 글들이 편지처럼 남아 있던걸 한 때 꺼내 읽어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혼자 영화를 찍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주연,배우 모두 오로지 혼자서만….
누군가의 등단소식에 축하해 주다가도 초라한 내 자신이 미운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들
앞에선 내 글을 발표가 안돼도 좋다고, 나 스스로만 만족하는 글을 써도 좋다고, 단 하나의
작품이라도 써서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너무나 건방진 얘기지만 그 땐 정말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글을 써서 내보고 싶다.
내가 생각하던 진실 혹은 방황, 인생의 어둡고 습한 그늘에서 작지만 느리게 피어 오르는
희망을 적어보고 싶다. 내가 결코 남과 다르지 않음을, 내 생각이 결국 보편타당한 진리임을,
아니 그리 거추장스러운 표현이 아니더라도 내 삶이 곧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볶는 일상이며
외롭고 힘들지 않다고 떠들지만 결국 지치고 힘빠져 누군가에게 머리를 기대고 싶고 내
든든한 어깨를 빌려 주고 싶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배운 게 이 것 밖에 없어 치과의사생활을 한다고 얘기하지만 음악가나 운동코치가
되었어도 밥은 먹고 살았을 것 같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바이올린 레슨을 가면 기분이 좋고
한동안 쉬었지만 운동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번엔 수영말고 태권도나 검도 쪽으로 눈을 돌려보는 중이다. 요즘은 과격한 운동이
좋아진다. 물론 주말에 하는 등산도 땀을 많이 흘린다. 고지를 탈환하고 땀을 흘리고 나면
"내 육체도 아직 싱싱하구나" 싶고 스트레스로 찌든 내 머리속에 활력이 샘솟는 것 같아
시원해진다.
나는 아직 미혼이다.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남들 다 하는 연애란 것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애인을 구하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젊고 싱싱한
새 애인을. 올 가을에는 이 지긋지긋한 원고지를 버리고 최신 노트북을 하나 장만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