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하숙집 친구가 있었다.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준수한 외모와 언변이 좋아 무척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다녔던 것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여자 친구가 없는 나로서는 외모와 전공이 그 친구보다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자 친구가 없는 이유를 아마도 여자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한 점과 연애경험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고 서점에서 연애에 관한 책을 구입하여 탐독한 적이 있었다. 지금 와서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3가지 요소를 지금도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여자에게 환심을 사는 조건이라고 해야 할까? 반드시 맞지는 않다. 왜냐고 묻는다면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으니까~
3가지 요소 중 하나는 칭찬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도 있듯이 빈말이라도 칭찬 앞에서 싫어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고 남자도 마찬가지다. 탤런트 송혜교 근처에도 못 가는 여자의 얼굴일지라도,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이라도 “어쩜 자세히 보니 송혜교 닮았네요!”라고 하면 과연 화내는 여자가 있을까? 면전에서는 “이 사람 누굴 놀리고 있네!” 하면서도 뒤돌아 혼자 있을 때는 기분 좋아할 여성이 대부분이다. 칭찬하는데 인색할 필요가 없고 칭찬으로 매너 있는 남성으로 탈바꿈할 수가 있다.
두 번째는 선물이다. 남자들의 선물은 기껏해야 몇 가지가 안 된다. 하지만 여성의 선물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어떤 것인지 몰라서 선물하기가 쉽지 않을 뿐 가방, 화장품, 옷, 액서사리 등 다양하게 예쁜 것, 귀여운 것 등 무엇을 사줘야 할지가 고민이고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을 만큼 고가의 것도 많다.
과거 후배가 공중보건의 시절 보건지소 여직원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값싼 매니큐어를 하나씩 선물을 했는데 모두들 좋아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선물로 여자의 환심을 사는 게 드라마에서도 나오는 방법 중에 하나이고 이미 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세 번째는 분위기 즉 무드이다. 분위기 모르고 분위기 없는 남자는 어디가나 찬밥신세다. 요즘은 여기에다 요리나 유머 감각까지 갖춰야 하는 것들이 추가가 될 만큼 매력적인 남자가 되기 쉽지는 않지만 결혼하고도 끊임없이 아내로부터 요구받고 구설수에 오르는 게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다. 아내와 성탄절에 만나 이듬해 11월 초에 결혼하기까지 1년 동안 연애하면서 기념일을 4번 맞이했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다. 우리나라와 상관없는 국적 불명의 기념일이지만 연애 기간 동안에는 아내도 그런 기념일을 그냥 무시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이다. 여성한테 받은 초콜릿을 남자가 주는 날로 알고 있다. 나와 아내의 생일날에 각각 기념품과 생일 파티를 조촐하게 하며 연애 기간 동안 달콤했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아내와 결혼하면서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만큼은 반드시 기억하고 꽃과 선물을 해주겠다고 나 혼자 다짐을 하였다. 그래서 해가 바뀌는 달에 받은 달력에다 1년 치 기념행사를 모두 기록하면서 두 날은 절대로 잊어버릴 일이 없게 결혼 28년 동안 챙기게 되었는데 28년 동안 변화는 이러하다.
결혼 1년 차 때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 나이와 연차 수만큼 장미꽃을 준비하였고 선물을 나름대로 고민하여 선사했다. 그런데 연차수가 거듭되고 나이가 증가하다 보니 장미꽃 수도 증가하여 꽃값이 생각보다는 비싸 지출도 늘어나게 되었다. 의미 없는 발렌타인이나 화이트는 점차 기념일에서 소멸되고 언제부터인가 5월 ‘가정의 달’에 새롭게 기념일로 ‘부부의 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5월 21일 둘이 하나가 되는 날이라 해서 21일이라고 한다. 부부 일심동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무튼 기념일이 있을 때 그냥은 못 지나가도록 매스컴에서 방송을 하다 보면 ‘부부의 날’에 간단한 선물이라도 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기념일에 소홀히 하여 아내로부터 불평불만과 가정불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라는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의 얘기 그리고 게스트로 나오는 여성들의 남편 흉보는 얘기에 시대의 트렌드를 읽을 수가 있다.
가정에서 우선순위에 애완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여 버린 남편들의 위치가 자못 서글플 때가 많다. 직장에서 명퇴 후 집안에서 삼시 세끼 먹는 것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고 살아 있다는 존재가 짐이 되어 버린 남자들의 인생 후반의 설 자리는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왔다.
또 다른 기념일은 아내와 첫 만남의 날이다. 우연히도 12월 25일 성탄절에 만나게 되어 기억하기도 좋아 그냥 넘기기에는 아쉬운 기념일이 되어버렸다.
여자들에게 인기 좋고 뭇 남성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탤런트 최수종의 아내에 대한 이벤트가 방송을 타고 시청자들에게 구설수가 된 이후에 결혼한 남성들의 아내에 대한 기념일 이벤트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간다. 결혼을 앞둔 남성들 사이에서 프로포즈, 기념일 챙기는 일들이 시대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남편일수록 인생 후반기에 가정적으로 행복한 노후를 맞이하게 되는 일이 되었다.
사실 기념일을 챙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내를 위한 따뜻한 말 한마디라고들 한다. 아마도 그런 부분에서 모두 공감을 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는 언제든지 있어 줄 것만 같고 편한 사이이다 보니 고마움의 존재를 잠시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 남자들은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제 힘든 세상을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젊을 때 권위를 내세우고 큰소리치던 가장이 노후에는 자식과 아내로부터 왕따가 되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사람들을 보곤 한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가족 구성원이 이해할 수 있고 보편타당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정의 화목에 중요한 덕목인 것 같다.
집안의 소통에 최적임자는 아내이다. 자식과의 대화에서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고 원만한 가정을 위해 아내의 기념일을 놓치지 않는 남편으로 살아가려면 미리미리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준비해야겠다.
이승룡 원장
서울 뿌리샘치과의원
<한맥문학> 수필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전)치의신보 집필위원
<2012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