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 눈을 끔뻑 끔뻑하더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것도 내 침대에서.
그와 함께 한 지난 4년여의 동거 기간 동안 내 침대는 그의 침대가 됐고, 나의 많은 것들을 그에게 빼앗겼으며, 함께 공유해야 했다. 사람도, 물건도.
퇴근 후 쉴라치면 종종 무방비 상태인 나의 입술을 훔치기도 하고, “앗! 뽀뽀 싫다고!”, “침? 더럽게시리.” 4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입맞춤은 별로다.
때로는 저돌적인 눈빛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경우도 많다. 이런 그와의 생활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게 된 존재가 된 그. 견(犬)이다.
이름은 쇼콜라, 지금은 ‘콜라’로 부른다. 나름 고급진 ‘쇼콜라’의 느낌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행실 자체가 귀족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포착돼 약간 저렴하지만 부르기도 편하고 입에 붙어서 지금은 ‘콜라’로 불리고 있다. 그래도 그는 ‘콜라’로 만족하는 듯하다. 하기야 ‘순대’보다는 나을 테지. 내가 처음에는 ‘순대’로 부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4년 5개월, 종은 푸들. 색은 진한 초콜릿 색과 순대 색, 콜라 색을 넘나든다. 털? 잘 안 빠지고, 잘 안 보인다. 이 부분이 콜라가 우리 집에서 대우받고 살 수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성이 부족하나 사람 좋아하고 같은 犬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4년 전 내 인생에 선물처럼 찾아온 녀석. 먼저 1년 반 동안 사랑받아오던 ‘쭌이’의 자리를 꿰차고 굴러들어온 ‘쇼콜라’. 아니 밀어내기로 들어왔지. 사랑하나 사랑받지 못했던 쭌. 흰색 스피츠였다. 반려견을 처음 키울 땐 꼭 피하라고 말하고 싶은 그 견. 하얗고 매력적인 털이 사막을 굴러다니는 가시덤불처럼 거실 바닥을 걸을 때마다 굴러다니는 털 뭉치를 볼 때는 아무리 애정하고 사랑해도 참 힘들었다. 거기에 쭌이만 보면 원수 만난 듯 째려보는 아빠도.
쭌이도 아빠만 보면 꼬리가 절로 쑥 내려가고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놈의 털 때문에. 쭌이랑 같이 살던 1년 반 동안 청소기를 종류별로 3대나 사들였다.
쭌이와 콜라가 함께 살았던 2주 동안은 진짜 눈물이 날 정도로 짠했다. 사랑받는 犬과 그를 바라보는 사랑받지 못하는 犬. 난 보았고, 느꼈었다. 쭌이의 슬픈 눈빛. 쭌이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내던 날, 그 집에서 엉엉 울던 나를 따라 나오던 쭌이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쭌, 잘 있지? 보고 싶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인지라 쭌이의 빈자리는 콜라가 잘 채워줘 지금은 쭌이 생각은 잘 안 난다.
4년 전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그날은 아침 일찍 아빠는 등산, 엄마는 친구들과 점심 약속. 나만 한가로이 남아 일요일 아침마다 즐겨보는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먼지털이 하나 손에 들고 신나게 털어가던 중 거실에서 돌아가던 로봇청소기가 뭐에 걸렸는지 소리가 안 나길래 거실로 나갔는데, ‘어? 이거 뭐지?’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드문드문 그려져 있는 갈색과 고동색을 섞어놓은 듯한 색깔의 이들은?
‘뭐 흘렸나? 뭐지?’ 너무나 생소하지만 뭔가 불길한 이 좋지 않은 느낌은? 헉, 그것은, 콜라다. 콜라가 해 놓은 짓이었다. 로봇청소기가 콜라가 누어 놓은 ‘변’을 물고 온 거실 바닥을 잘도 돌아다닌 것이다.
“야, 너 뭐야? 죽을래? 나가~”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 콜라가 흠칫 놀라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문득 대학 때 엄마 친구에게 분양받아 데리고 온 3개월 애기 강아지를 아빠가 현관문 밖으로 집어던져서 그 다리도 짧은 애기 강아지가 위층까지 뛰어올라갔었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도 아무 데나 똥을 싸서였지. 그 애기 강아지는 내가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고 들어왔던 어느 날 아침 엄마한테 미안하니까 괜히 애교 떨고 있었는데.
“뭐 허전한 거 없어?”(엄마), “아롱이! 아롱이 어딨어?”(나), “아빠가 모텔 하는 친구한테 집 지키라고 가져다 주셨어”(엄마), “우왕~아롱이 다시 데리고 와~”(나) 그 애기 강아지는 말티즈.
아빠 맘이 이해가 가는 시점이었다. 그때는 나도 콜라를 내쫓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엄마는 깔끔여왕. 아빠는 까칠대왕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의 정신세계는 정말 피곤하기 짝이 없는데 콜라까지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이를 어쩌지? 도대체 똥을 물고 어디까지 돌아다닌 거야. 다 돌아다니라고 방방마다 문도 다 열어놨는데 오늘 나는 죽는구나.’
얼른 방마다 확인해 봤더니 다행스럽게도 방으로는 안 들어간 것 같다. ‘도대체 뭘 먹였길래 변이 이렇게 물렀지?’ 뭘 먹이긴 뭘 먹였겠어. 예뻐하니 각종 간식과 나도 잘 못 먹는 쇠고기 구워줬겠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로봇청소기부터 들어서 욕실에 놓고 물티슈를 들었다. 엄마가 알면 나하고 콜라는 죽는다. 아니 나만 죽겠지. 울 엄마는 깔끔여왕이라 손가락으로 쓱 닦아보는 스타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점심 약속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제발 노래방까지 다녀오시기를. 지금 생각하면 거의 정신이 나갔었던 거 같다.
로봇청소기가 물고 다녔던 변은 벌써 말라가고 있었고, 유리세정제 뿌려서 불리고 물티슈로 일일이 닦아내다 보니 팔도 아프고, 짜증도 나고 그냥 마포로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럼 안 묻은 곳도 다 발리는 상황이라 그러지도 못했다.
1차 윈덱 & 물티슈, 2차 마포질, 3차 또 마포질, 4차 걸레질. 이 정도면 변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겠지?
거실은 거의 마무리됐고, 걸레를 들고 욕실로 들어서니 세면대 위에 올려놓은 로봇청소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 로봇청소기.
윗면은 멀쩡하지만 바닥 면을 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롤링 솔 전체에 끼어있는 잔해들.
‘헐.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시달렸던 것 같다. 엄마한테는 얘기했지만 아빠한테는 얘기 안 했다. 또 집 지키라고 다른 집 가져다주면 안 되니까. 엄마가 그랬는데 콜라 잘못이 아니고 로봇청소기 잘못이란다. 흥! 엄마의 최애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내 머릿속엔 아직도 콜라의 잘못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동안 로봇청소기는 쓸 수 없었다. 아빠가 가끔 로봇 청소기 돌려주신다고 했을 때도 꿋꿋이 일반 청소기를 이용해 내가 직접 모든 곳을 스캔하며 청소기를 돌렸다.
지금 그 로봇 청소기는 내 피아노 밑에서 언제 다시 거실을 누빌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충전의 늪에 빠져있다. 안 꺼내준다 욘석아!
그날 날 바라보던 콜라 눈빛이 ‘그랬지만 괜찮아?’ 이렇게 물어보는 듯했다. 자기 잘못은 없다는 거지. 아니! 안 괜찮거든! 안 괜찮다고~.
지금은 아침마다 날 깨우고, 식구들 잘 자고 일어났는지 방방마다 돌아다닌다. 쉬야하면 신나게 달려와 칭찬해 달라고 하고, 응가 해도 달려와 칭찬해 달라고 한다.
똑똑한 건지 내가 출근 전, 퇴근 후에만 쉬하고 응가를 한단다. 나만 힘든 거지.
그래도 이제는 뭔 짓을 하던, 뭔 사고를 치던.
콜라야, 그랬지만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