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문 호 교수님을 기억하며
차문호 교수님(車文豪, ’24.7.4~’76.7.20)을 만난 것은 3 학년 소치(소아치과학) 강의시간이었습니다. 반듯한 정장에 당시로는 드문 나비넥타이를 매고 “내레, 내레~” 하시는 등 진한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 웃음도 없이 최신 소치학 원서 한권을 형태학부터 성장발육, 병리학까지 강의 하셨습니다. 당시는 전공 교과서의 한 장을 선정해 강의하거나 결강, 휴강이 흔한 때였습니다.
교수님은 평남 선천군 수청면 학현동 51번지에서 출생하시고 신의주 동공립중학교(6년제 ’43.3.20)와 서울대 치대(1회 ’47.7.11)를 나오시고, 문교부 영어학교를 수료(’47.1~’48.1) 후 주한 미국대사관병원 치과(’49.4.10~10.30)와 미국 워싱톤주립대 치대서 소치학을 수학 하셨고(’54.9.14~’55.8.9) 미국 미네소타대 치대서 연수(’78.3~5) 하셨습니다. 뉴질랜드 웰링톤 치과학회 WHO(’54.5~6), 덴마크 코펜하겐 소아치과서 연수(’67.3~6) 하시고 싱가폴 세미나 (’81.3~4)에 참석 하셨습니다.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 뉴질랜드, 덴마크, 싱가폴 치대서 연수나 방문, 국제적 안목을 넓히시어 외국인 방문자가 오면 대학과 병원시설을 안내 하시는 등 차 교수님처럼 외국인과 소통하는 교수님도 드물었습니다.
어떤 교수는 외국 나갈 기회를 후학들에게 주지 않고 본인만 간다며 좋지 않은 말을 하기도 했으나 시기, 질투지요.
“차 교수님의 영어는 우리말 하시는 것 보다 낫다는 말씀을 들으실 정도의 유창한 영어와 일어의 구사능력으로 외국 학자들과 국내의 제자들 사이에 가교역할을 하셨습니다.(’96.7.24 차문호 선생님 영전에, 한세현 교수 추모사)”
“교수님은 제자들을 대하실 때 가장 엄격한 교육자이시며 실천자이시니 그 훌륭하심을 그 누가 부정 할 수 있겠습니까?(’84.6 회갑기념 논문집 증정헌정사, 문하생 일동)”
“교수님은 소아치과라는 생소한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 하시고 소아치과와 소아치과학 교실을 만드시고 소아치과학회를 창설 하셨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시었고 11개 치대에도 소아치과학 교실을 만드셨습니다.(차문호 교수 정년퇴임기념 강연회 서울대 치대 ’89.3.30, 고 차문호 교수 영결식 조사 김광남 학장 ’96.7.24, 차문호 선생님 영전에 한세현 교수 추모사 ’96.7.24)”
“선생님께서 주신 귀한 말씀과 가르침은 이제 너무 강건하게 뿌리를 내려 저희 소아치과학 교실의 정신적 바탕이 되도록 애쓰셨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선생님은 나태와 자만에는 엄격한 스승이셨지만, 평소 제자들을 대하실 때는 자상하고 훈훈한 인정이 넘치시어 오늘날 질서와 화목이 함께하는 저희 교실로 이끌어 오셨습니다.(차문호 교수 정년퇴임 축하연, 존경하는 차문호 선생님께 교수 김진태 인터콘티넨탈호텔 로즈룸 ’89.8.30)”
교수님은 서울치대 부속병원 소아치과 과장, 치대 부속병원장(’62.9.22~‘64.3.16), 치과진료부원장(’82.8.20~’86.6.3)을 하셨으나 치대 1회 동기 교수님들(김영해 2회 졸, 김주환, 선우양국, 안형규, 차문호) 중 유일하게 임명직이던 학장직을 끝까지 사양 하셨습니다.
이분들 중 세분은 이북서 내려와 8.15 해방과 남북분단으로 생활비, 학비 등이 끊기자 ‘나기라 다쓰미’ 일인학장 관사에 머물며 종로 4가 동대문시장 입구서 비누 등을 판매하는 노점상을 하였다고 전해 옵니다.
때문인지(?) 교수님은 소공동 치대시절 미도파 백화점 옆에 치과개원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원내생으로 올라갈 때는 몇 가지 진료기구를 각자 구입하고 검사에 통과해야 원내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지금은 상상도 못하지요).
진료기구가 절대로 부족한 때문이겠지요. 특히 보존과가 심해 진료실 입구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먼저 기구검사에 통과한 동료의 것을 빌려 자기 것으로 검사받고 들어갔는데 그러다가 진료 중에 필요하면 이곳저곳 진료대 위에 놓인 기구를 가져가는 등 감염문제는 생각 할 수도 없었지요.
들리는 말로는 선배들이 개업 할 때 진료기구를 빌려가 반납하지 않거나 지금 기구들을 모두 설치하면 나중 후학들은 사용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답니다. 치과환자도 많지 않아 출석번호대로 환자를 배정 받았고, 자기가 치료할 환자를 데려와 병원서 요구하는 임상 케이스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치는 달랐습니다. OECD(?) 차관으로 들어온 기자재들을 구 비해 놓아 원내생은 빈손(?)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로 부임한 이영옥 치과병원장이 7층 창고에 원조 받은 기자재가 몇 년째 쌓여 있는데 이것을 정리하라 해서 무더운 장마철 여름날 선풍기도 없고 조명도 안 된 찜통창고서 몇 일을 고생 했습니다. 수련의 몇 명과 시작했는데 중간에 모두 도망(?)가고 저와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서무과 임시직 1명만 남아 그 당시론 드문 한글, 영문 타자기로 기자재 리스트를 작성 했습니다.
그 일이 생각나 차 교수님께 말씀드려 라바담, 소치용 크램프 등을 청구해 사용했습니다. 당시 치대부속병원은 오후 1시까지 진료 했는데 4.19 직후라 교수님들이 원내생을 피하는지, 아니면 교수님 성토사건(?) 후라 그런지 원내에 잘 안계시어 저희 동기들끼리 짝을 지어 진료 했는데 Foot Engine으로 동력을 얻어야 함으로 누군가 옆에서 페달을 열심히 밞아 주어야 핸드피스가 돌아가고 그 힘으로 치아를 삭제 할 수 있었습니다.
4.19때 저희 원내생들은 전 교수님을 6층 강당 단상으로 모셔와 대학과 병원운영에 대한 성토(?)를 했는데, 4학년은 학생실습이 없고 임상만 있는데 왜 실습비를 그대로 받느냐? 소치진료실은 기자재를 비치하고 있는데 보존과 등은 왜 각자 진료기구를 구입해야 하는지 등을 질문 했습니다.
물론 차 교수님은 원내생을 인격적으로(?) 대우 하라는 요구도 있었지요.
차 교수님은 소치 진료실 입구에서 원내생에게 “자네, 장발 머리가 이게 뭐야?(무엇이냐?) , 까운이 불결해 보이면 서울시 청소과서 왔냐? 흙이 묻은 구두신고 어딜 들어오려느냐?”는 등 즉석에서 꾸짖으셨습니다. 그때 교수님께 당해 보지 않은 원내생은 없을 것이고 저도 당했습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진료실에서 “선생들 주목! 목 선생(목영준 7회 작고)! 김 선생(김진태 교수 12회 작고) 주목~ 하시면 모든 스텝들은 진료를 멈추고 교수님을 향해 부동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했고, 저희들 원내생은 물론 환자 보호자도 영문도 모르고 그대로 섰습니다.
캐비넷 기구가 정돈 안 되었거나 진료대 주위가 불결 하다는 등 사소한 일까지 지적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겠지만 진료 중 심하게 우는 유아 환자는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암실에 감금(?) 했지요.
구강외과, 보철과, 보존과 등은 개원의나 공군, 해군에 장기복무를 지원한 선배들, 대학원 석사과정 생들이 진료하고 저희들 원내생은 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소치진료실은 군위탁생이나 대학원생은 없고(’63년부터 석사입학) 해외서 연수 후 오시거나 해외로 나가기 위해 준비 중인 선배들이 진료 했습니다. 목영준(7회), 장세만(9회), 방 성(프랑스), 김명수, 김영옥(재미), 이영애(재미) 10회 6분과, 박한중(재미), 박복남(재미), 정수예(캐나다) 등 11회 3분, 그리고 고 김진태 교수님(12회), 이 억 (캐나다), 고 유익수, 이현재 등 14회 3분입니다.
실습이 있는 날은 진료실을 닿고 전 스텝들이 학생실습에 참가 했습니다. 저희들은 각자 구입한 교합기의 유치에서 아말감 충전을 했습니다. 채점을 마친 이 교합기는 학기말에 각자에게 돌려주었는데 60년이 지난 지금도 갖고 있다가 작년 치대 박물관에 기증 했습니다.
어느날 치협 군무이사라는 분이 원내생들을 강당에 모이게 하고 “그동안 군의학교 입소에 불합격한 선배들이 상당수가 누적되어 있는데 금년에 이들 모두가 사병입소 영장이 나온다며 올해 졸업생은 전원 군 입대 못하고 그동안 낙방된 선배들을 군의학교에 입교하도록 국방부와 합의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 졸업까지만 군 입대가 연기되나 졸업하면 모두 사병영장이 나올 수 있어 각자 종합병원 치과에 인턴이나 엑스턴으로 이름을 올려야 입영연기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치과 인턴이 있는 곳은 서울대, 연세대 뿐이고 서울대치대 부속 병원은 저희가 졸업하는 1961년부터 Kim’s Plan 제도(김정렬 국방장관 이름을 따서 킴스플랜, 3년간 수련의를 한 후 대위로 임관, 이 기간 동안 군입대 연기)를 처음 시행 하면서 인턴 10여명을 선발했는데 저는 여기에 포함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종합병원 치과나 본인도 원하지 않지만 인턴, 엑스턴(무보수)으로 이름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후 서울치대 부속병원에 각과를 순회하는 로테이팅이 아닌 스트레이트 인턴으로 몇 명 더 들어 왔습니다.
휴학 중이던 K군(순복음교회 장로)이 가끔 대학에 오면 아무나 붙들고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는지 이 친구가 멀리서 보이면 모두 자리를 피했는데 근엄하신 차 교수님은 김 군과 복도 긴 의자에 앉아 그 친구의 전도를 끝까지 경청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후일 저도 동기와 점심 후 근처 찻집에서 차 교수님 일행을 만나 동석 했을 때, 겁도 없이(?) 교수님께 “교회에 나가시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참 성경공부에 몰두되어(?)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학생포함) “교회 나가느냐?” 물었고 심지어 중간, 기말시험지 여백에 성경구절을 적어 넣었습니다(동료교수가 문제가 생기면 곤란 할 텐데~ 라고도 했지만).
교수님은 저에게 “이봐! 나도 젊었을 때 교회 나갔고 내 친척 동생이 권사야!” 하시며 동석한 S교수(순복음교회 장로, 한세대 총장)에게 “이봐 S 장로! 나 죽으면 자네가 알아서 천당 가게 해 줄 수 있지?” 하는데도 S 교수는 말없이 미소만 띄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줄담배(?)를 피시고, 낮술을 즐기시는지 얼굴이 붉어 있었습니다.
항상 열려있는 교수님 방 앞을 지날 때 면 교수님은 오랜 당뇨로 건강이 안 좋아 지셨는지 홀로 도시락을 드시고, 담배연기 때문인지 방에는 큰 화분 여러 개가 놓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은 저에게 “자네, 학생담당학장보(현 학생부원장)하지 않겠나?” 하시어 저는 “학장님이 하시는 것이고 원장님이 정하는 것은 아니시지요?”했더니 영해(김영해 학장, 신의주 동중학교 동기)가 자네 의중을 알아보라 하였답니다.
대학에 제 동기가 8명 있고 특히 전임자가 Y교수를 추천 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하니 “후임자가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아? 자네 동기들 모두가 하겠다는 거야!” 했습니다.
저는 K 학장님, 원장님이 얼마 전 D 치대학장으로 가신 S교수님과 저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을 다 아실 텐데 저를 쓰시겠다는 것과, 직접 제게 말씀 안하고 원장님께 알아보라는 것도 이해 안 된다며, 원장님이 학장 하실 때 열심히 보필(?)하겠다며 얼른 그 자리만 피하려 했습니다.
교수님은 제 말을 들으시고 “뭬라고? 영해나 나나 같은 의견이야! 내말이 영해 말이야!” 하시며 3일 후 답변 하라 했습니다. 학장, 원장님은 Y교수님과 이북서 내려와 함께 고생하신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지금은 치의학대학원에 원장, 교무, 학생, 연구, 기획부원장등이 있으나 그때는 학장, 교무, 학생담당학장보만 있어 보직경쟁(?)이 심했습니다.
교실에 혼자 이고(현재 교수 5 인) 제 과목의 특성상 치대 두세 곳을 출강하고 있어 보직 맡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1980 년대 군사정권시절 지방부터 시작한 고교 평준화가 서울지역까지 확대되고 대학입시는 정원 120%를 선발하고 졸업은 100%만 시켰습니다. 재학 중 공부만 하고 데모는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그때 연건캠퍼스는 인접한 성대, 의대, 치대생 등 학생데모로 온 종일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고, 경찰과의 투석전으로 어디서 돌이 날아올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2년간 학생담당학장보를 하면서 일주일에 몇 일을 관악 본부서 열리는 비상대책회의에 밤늦게 까지 있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치대 학생회장이 지금 치과병원장입니다.
교수님과 함께 어느 날 승용차로 여의도 KBS 앞을 지날 때 이곳은 이산가족을 찾는 실향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KBS에 친한 친구가 감사로 있는데 들려 보시지 않으시겠느냐?”하며 이 친구 안내로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수님도 이산가족 신청 하시지요?” 했더니 대답을 안 하시다가 얼마 후 “김 교수, 내가 가족을 찾는다는 것이 북쪽에 알려지면 내 가족들은 그날로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네! 서로 죽은 줄 알고 지내다 나중에 다른 세상에서 만나게 될는지~” 하시며 끝을 흐리셨습니다. 저의 생각이 너무 짧았고, 그때 순간적으로 본 교수님 표정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정년 후(’89. 8. 30) 얼마 지나 당시로는 드물게 원남동 근교서 개원 하셨는데 가끔 대학근처 레스토랑에서 홀로 점심 드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간 일행은 못 본척하고 나갔는데 저만 교수님께 가서 인사 드렸는데 이것이 교수님을 마지막 뵈 온 자리였습니다.
교수님은 경기도 가평군 강촌 부근서 견지낚시 중 갑자기 불어난 물살에 휩쓸려 72세로 타계 (’96.7.26) 하셨고 가평군 경춘묘원에 안장 되셨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장마철이라 이날 강물이 불었는데도 강가에 옷가지와 구두가 그대로 있어 이상하다는 신고를 받고 실종자 수색을 했다 합니다.
저 아는 분도 등산할 때 둘이서 가더라도 중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다른 길로 간다며 몇일 걸리는 산행도 혼자서 다닌다 했습니다.
교수님이 정년 후 혼자 계시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교수님이 타계 하실 때 저는 미국에 연수중이어서 문상을 못 드렸습니다.
우스개말로 요즘 미세먼지가 심해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전쟁, 홍수, 지진···(?) 정답은 “별 볼일 없다” 입니다.
교수님은 저희 세대에 큰 별이셨습니다. 부디 이번 설날 천국에서 꿈에 그리시던 가족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21년 설날에
김 철 위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