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소아치과에서 진료를 하는 저는 진료실에서 환자와의 면담을 통해 환자 특성에 맞추어 진료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최근 한 환자를 진료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보호자는 환아가 받았으면 하는 치료 내용과 부위를 이미 결정한 상태로 내원했고, 제가 세운 치의학적 관점의 계획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제 계획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보호자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보호자와 라포르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언쟁으로 발전해 좋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환자, 보호자, 치과의사 삼각구도에서 어떤 식으로 대처하고 설득해야 할지, 의료윤리의 관점에서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익명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먼저, 환자, 보호자, 치과의사라는 삼각구도와 그 충돌은 소아치과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인이 되면 개인이 거의 모든 결정을 내리는 서양권의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많은 결정, 특히 의료적 결정이 내려질 때 가족이 끼어들거나, 환자 본인보다 가족이 발언권이 더 큰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진료 상황과 달리 소아를 대하는 것은 특별한 부분이 있지요. 환아는 자신의 선호가 없거나 이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대상으로 여겨지고, 결정은 주로 보호자와 치과의사 사이에 이뤄집니다. 비슷한 경우는 인지 장애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진료가 있겠네요. 이런 환자를 자율성이 감소한 상태 또는 제한된 자율성을 지닌 상태라고 말합니다.
보호자와 치과의사 사이의 갈등을 보기 전에, 먼저 환자와 치과의사 사이의 갈등에 관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환자가 원하는 치료 방향과 치과의사가 생각하는 좋은 치료가 다를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환자-의료인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 환자가 원하는 치료 방향에 따라가는 것이 맞습니다. 윤리적으로도 일단 환자의 몸에 가해지는 치료에 대해선 환자가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맞고, 법적으로도 환자의 결정을 우선하고 있습니다.
물론, 환자가 과도하거나 불가능한 결과를, 또는 잘못된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 치과의사는 이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아직 법에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환자가 요구하는 치료 계획에 문제가 있다면 치과의사는 환자에게 그 계획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를 충분히 기록에 남긴 뒤 자신이 그 계획에 따라갈 수 없음을 밝히는 절차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렇게 했을 경우 아직까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만, 이후에 법적 분쟁이 생길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그렇다면 보호자와 치과의사가 내린 결정이 다른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족이 법정대리인인지 보호자인지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외국은 보호자에게 별도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국내 의료법과 의료윤리 문헌은 보호자에게 어느 정도의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정대리인이 아닌 보호자의 경우 별도의 고려가 필요하고 이는 기존 관행과 문화 등 여러 요소를 따져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됩니다. 하지만 질문하신 사항과 같이 부모와 아이의 경우, 친권자는 민법상 자녀의 법정대리인이므로 의료적 의사결정에서 우선권을 가지게 되지요.
따라서 이 경우엔 부모님의 결정이 치과의사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일단 따라야 하고, 과도하거나 잘못된 요구일 때 조심스럽게 거부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요. 치과의사의 의견은 어디에 반영되어야 할까요? 치과의사는 그저 거부권만 가질 뿐일까요? 분명 환자나 환아에게 좋은 것이라고 해도, 치과의사는 이를 권할 수 없는 걸까요?
이를 의료윤리에선 자율성과 선행의 충돌이라고 합니다. 환자는 자기 신체에 벌어지는 일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자율성과, 의료인은 환자에게 의료적으로 최선의 이득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선행은 의료윤리의 시금석이 되는 두 원칙이지만, 진료 상황에서 종종 충돌합니다. 의료인이 제시한 최선의 선택이 환자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환자가 다른 것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꽤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내놓는 해결책은 연구자마다 다르기에, “의료윤리”에 묻는다고 하여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고, 앞서 살핀 법적 결정처럼 일단 환자 결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료와 의료윤리학 중간에 있는 저로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환자 의견이 우선되어야 할 때도 있지만, 의료인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할 때도 분명 있거든요.
저는 선생님께서 환아를 위하여 최선의 치료 계획을 세우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계획을 어떻게 관철할지, 이 계획을 어떻게 보호자가 따라오게 해야 할지, 아니면 그 사이에서 결정을 어떻게 조정할지가 중요하겠지요. 네, 이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선생님의 계획을 밀고 나간다면 어떤 태도를 취한다 해도, 결국 보호자는 떨어져 나갈 거예요. 말씀 주신 것처럼, 이건 라포르가 있다고 하여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조정과 연결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말로는 “밀당”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선생님께서 세운 치료 계획에서 꼭 필요한 것과 가변적인 부분을 구분하고, 꼭 필요한 것은 취하되 가변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선 보호자를 따라가거나 중간의 지점을 찾는 방법이지요. 이런 일을 타고나서 능숙하게 하시는 분들도 가끔 계시지만, 보통 우리는 이런 부분을 매우 어려워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소설을 읽는 것으로 이런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서사의학’ 연구자인데, 여름에 책으로 소개드릴 예정입니다.
정리하면, 법적으로나 의료윤리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볼 땐 보호자의 결정을 따라가거나, 어려운 경우엔 진료를 거부하고 다른 선생님에게 의뢰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의료윤리의 다른 관점에서 볼 땐, 환자도 좋은 치료 결과를 누려야 하고, 보호자도 만족해야 하며, 치과의사도 그 과정에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무조건 보호자의 결정을 따르는 대신 미세한 조정의 기술이 필요하고. 이를 의료인문학이 도와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