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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공원 이야기

스펙트럼

무더위가 한창인 어느 날, 서울 신혼집 천장에 빌트인 되어 있는 에어컨이 고장났습니다. 빠른 수리를 위해 당장 방문해줄 수 있는 사설 업자를 수소문하였지만 수리 난이도와 부품 재고 문제로 결국 공식 서비스센터 수리기사를 예약해야만 했습니다. 기다림의 기간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특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주말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난생처음 ‘호캉스’라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호캉스지 생존을 위한 탈출에 가까운지라, 이전에도 종종 이용했던 서울역 근처 가성비 좋은 호텔로 빠르게 예약을 마쳤습니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은 어딘가 어색했습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노숙인 상담 활동을 위해 일주일에도 몇 번씩 향하던 길을, 누군가를 위한 옷가지와 보온병을 커다란 배낭에 메고 향하던 그 길을, 갈아입을 속옷과 노트북만 가볍게 챙겨 가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혹서기마다 500mL 물병을 40개씩 지고 빌딩 숲 이곳저곳에 숨어 지내는 이들을 찾아다니던 제가, 그중 어떤 빌딩에서 세미나를 듣고 또 어떤 빌딩에서는 호캉스를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숙소는 무척이나 쾌적했습니다. 빵빵한 에어컨에 커다란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 창문 너머로는 넓은 공원이 한눈에 들여다보였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는 치과계 모 기업의 본사 건물과 마주 접한, 서소문공원입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서소문공원은 한때 노숙인 40여 명이 움막을 짓고 살던 곳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서 전해 듣기로는, 1900년대 중반부터 고가다리 밑, 철길 주변에서 살던 소위 ‘거지’라 불리던 사람들이 주변의 도시화로 인해 한곳에 모여 지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그곳이 공원으로 지정되어 정비되었다고 합니다.


2000년대 후반 이들을 처음 만나던 시절의 서소문공원은 대단히 괴이했습니다. 높이 솟은 빌딩 숲 사이 정돈된 공원 한 켠에 여러 움막집이 존재했는데, 제법 잘 지어진 집에는 연통이 있어 주전자를 올리면 물까지 끓일 수 있었습니다. 반려동물을 기르며 새끼 한 마리 가져가라는 사람, 온 동네 은행 열매를 주워다가 양동이에 박박 씻으며 금방 구워준다는 사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자신을 예언자라 칭하던 자칭 예수까지,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았습니다.

 

사건사고도 많았습니다. 고성방가를 제외하고는 노숙인이 가해자가 되는 일은 드물었고, 일반인에 의한 방화나 폭행이 잦았습니다. 한 노숙인의 사망사고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지자체 차원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 그 출발은 다소 엉뚱하게도 움막을 모두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설업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의 능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라서,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그 전보다 더 크고 튼튼한 집을 완성해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까, 만반의 준비로 반격이 가해졌습니다. 별안간 등장한 포크레인이 움막을 부수고, 그 흔적은 일사천리로 폐기되었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쏟아부었고, 중장비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는 어여쁜 꽃을 가득 심었습니다. 움막민들의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도 꾸준했습니다. 정신병원을 비롯한 요양시설 입소가 주된 방법이었고, 고가다리 밑으로 옮겨간 이들을 대상으로는 울룩불룩한 바닥공사도 불사했습니다. 몇몇 이들은 때로 늦은 새벽 이주 과정에서 덤프트럭에 치이는 등 불의의 사고에 의해 영영 소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로 계속 침체되었던 서소문공원 일대는 천주교 교황의 방문으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너른 잔디가 일품인 역사공원으로 리모델링되어 많은 이들이 애견, 또 가족과 찾는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저 또한 근처를 찾아 해질녘 푸르른 공기를 맞으며 넉넉한 여유를 만끽했습니다. 공원 한 켠에 누워 있는 ‘노숙자 예수’ 동상을 마주하여, 그보다 전에 있던 자칭 예수를 대하듯 왜 마스크를 하지 않았냐 마음으로 채근해 봅니다. ‘너는 집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있냐?’ 되레 화를 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얼른 성호를 그었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