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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엄마

Relay Essay 제2466번째

동네 어르신들 보면 가끔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도 난다. 국민학교 6학년 내일이 개학날, 8월 24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우리 가족과 함께 살던. 엄마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병 수발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6월 15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 가족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다가 쫓겨난 날이.


나는 4년 전 큰엄마, 큰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나갔던 날을 기억한다.


12월 24일 큰엄마, 큰아빠가 이사 나간 날이다. 그 시절 구경도 한번 못해 본 아파트란다. 이삿짐 나르는데 엄마를 졸래졸래 따라가서 아직 온기가 돌지 않은 추운 방에 빨간 이불 짐을 내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가 혼잣말로 ‘뭐가 급하다고 이 추운 겨울에’라고 한숨 쉬던 모습도. 근방에 살고 있었던 나와 오빠를 매일 밤마다 데리러 오던 할아버지를, 매일 데리고 자던 사촌오빠들의 따뜻한 온기를 그리워했겠지. 엄마는 가기 싫은 나와 오빠의 손을 잡으며, 오늘만 자고 오라고. 그건 매일이었다.


그러기를 한 3, 4개월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다고,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고. 어린 마음에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큰 집. 대소사가 이뤄지고 동네의 기둥으로 일컬어졌던, 내 알기로는 그 시절, 그 지역에서 잘 나가는 집안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바로 그 집으로 입성을 하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나의 형제들은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야호’를 외쳤다. 맛난 것도 많고 은근 뻐기며 살 수 있으니까. 아가들도 그런 건 아나보다. 그런데 이사 들어가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엄마는 나를 붙들고 괴로움을 토로하는 일이 잦아졌다. 큰집,  작은집들, 고모들. 집안 족보가 좀 복잡하고 나열하는 수보다 더 많다. 재산 보고 모시러 들어간 거 아니냐고. 엄마는 진심이었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우리 엄마는 진심이었을 거다.


엄마는 원래 그런 스타일이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자였다. 요즘은 객관적으로 봐도 엄마 편이 틀림없다.


그런데 주변의 시선은 그러지 않았나 보다. 엄마는 서울에 부유한 집에서 시집 온 아가씨였고,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가시였던 상황이었다. 하다못해 크는 애들 옷을 비싼 백화점에서 사다 입히고, 허영 덩어리에 낭비가 심하고, 비싼 옷이라 다림질해서 입힌 옷들이 구겨질까봐 앉지도 못하게 한다는 둥의 구설들이 친척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게 트집 잡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 친척들이 보는 입장은 다를 수도 있었겠지.


구설은 아니고 사실이었다. 엄마는 늘 옷이 구겨지기 때문에 다리를 구부리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우리에게 펼쳤고, 정말 허벅지 많이 꼬집혔다. 아빠는 속옷까지 다려 입혔으니.


정말 친척들은 엄마를 달달 볶았다. 친척이 아닌 ‘천적’. 그냥 서울에서 시집 온 엄마가 싫었나 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우리 가족은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다. 아빠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셔야 했고, 수시로 친척들의 모략으로, 재산을 탐내고 들어온 자식으로 몰리기 일쑤였다. 엄마는 매일 울고, 아주 모일 때마다 신경전을 펼치는데, 어린 내가 봐도 징글징글했다. 할머니도 아파서 큰 병원에 입원 하셨고, 그리고 할아버지의 투병. 병원에서 손을 놓은 할아버지를 살리려고 굿도 2번이나 했다.


엄마는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를 데리고 여러 점집을 다니셨다. 용하다는 무당이 와서 두 번이나 굿을 했을 때는 정말 뿌듯한 자부심도 들었다. 동네가 야단법석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할아버지의 병이 오빠가 옮아서 엄마는 눈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기억난다. 오빠가 맨날 소변이 오렌지주스 색깔이라고 학교에서 애들이 놀린다고. 엄마는 엉엉 울면서 영양제 색깔이 오렌지색깔이라 그래서 그렇다고. 난 알고 있었다. 오빠가 할아버지 결핵을 옮아서 그 약을 먹어야 했다는 것을. 1년을 넘도록 오빠에게 그 결핵약을 먹이면서 엄마는 무너졌으리라.


그러한 여러 일들을 겪으며, 우리가족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러 들어간 지 4년 만에 친척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버리고 나오는 형국이었다. 남들이 보면 다 버리고 나오는 거다. 온갖 소문과 구설을 등지고. 우리가족은 그냥 내팽개쳐져 버려졌으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할머니를  막내 작은아빠가 모시러 들어갔는데, 상황은 똑같더라. 막내 작은아빠도 모시러 들어간 지 1년 반 만에 온갖 욕을 들으며 쫓겨 나왔다.


그 후로 할머니는 외로운 삶을 사시다가, 아마 홀로 사신지 2년가량 지나서 아무 이유 없이 몸져 누우셨다. 노환이었겠지.


큰엄마, 큰아빠가 먼저 모셔갔다. 다섯 달쯤 됐을 거다. 각 자식마다 1개월씩 돌아가며 모셔야 한다고. 내가 보기엔 빨리 돌아가실 것 같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요양원도 없던 시절이니까.


우리집에도 할머니가 오셨었는데 엄마가 자주 우셨다. 이것저것 다 잘 드셔야 하는데 많이 못 드신다고. 할머니가 엄마를 잘 못 알아보셨다. 치매를 앓고 계셨었나보다. 하기야 집안의 유일 딸인 나도 잘 못 알아보셨으니까.


오죽하면 나는 방 안에 방금 전 본 대변 냄새가 진동을 해도 치워드리지도 않고 모르는 척 내빼기도 했다. 할머니가 몸져누워 계실 땐 주로 엄마가 병수발을 드셨고, 아빠를 비롯한 남자들은 방에 잘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아마 할머니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한 달만 모시라고 했는데 두 세 달 쯤, 내 알기론 엄마가 더 모신다고 했던 거로 기억한다. 엄만 바보다.


그러다 큰엄마가 할머니를 모셔갔다. 작은고모가 오셔서 식사량 줄이라고 한마디 하고 가셨다던데. 집안에서 작은고모는 브레인으로 통했고 그나마 엄마를 아껴주셨다. 그 후로 이틀 뒤 할머니는 큰엄마 집으로 가셨고, 얼마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큰엄마 집으로 가시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물론 그 많은 유산은 큰집의 독식이 됐다. 신도시 개발지구의 땅이 어마어마했다던데, 뭐 내 땅 아니니까.


엄마는 가끔 할머니 얘기를 하신다. 그때 맞벌이를 하셨던 엄마는 그래도 항상 아침, 점심, 저녁 다 챙겨드리고, 기저귀도 갈아드리고 그랬다. 쌀로 죽을 못 쒀 드리고 밥으로 죽을 쒀드렸다고 죄송하다고. 항상 곁에 있지 못해드렸다고. 기억하지 못해도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30년이 다 돼가는 얘기지만 가끔 할머니 얘기를 하신다.


“엄니, 다 까먹어도 나는 까먹지 마요. 나 까먹으면 속상해”하고 울먹이던,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 나에게는 할머니였지만, 엄마에게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였던,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관계다. 이제 할머니의 나이보다 더 먹은 엄마가 어느 과거의 날을 아직도 추억하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