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서울역 산타

스펙트럼

병원 로비에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리모델링으로 확장된 공간을 넉넉히 활용한 2층 높이 트리와 각종 장식이 설치된 것입니다. 늦은 밤까지 반짝이는 트리를 지나치며 매일의 야근길에 묘한 위로를 받습니다. 사실 예방치과 진료실에는 이보다 일찍 크리스마스 장식을 설치했습니다. 팍팍한 전공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신선한 자극을 주고자 일찌감치 창가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주렁주렁 매달아 둔 것입니다. 불 꺼진 진료실에 조용히 앉아 반짝이는 전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서울역에서 노숙인들과 함께해온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노숙인 상담원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날입니다. 수많은 민간 종교단체가 각종 선물 보따리를 싸 들고 거리로 쏟아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 종로, 용산, 영등포 등지에서 서울역으로 유입된 노숙인들과 종교인들이 뒤얽혀 크고 작은 마찰이 빚어지기에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날은 평소보다 한 두시간 일찍 활동을 시작합니다. 역사 내 푸드코트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역 광장으로 나가 하나둘씩 나타나는 종교단체 무리를 찾아가 정중하게 주의사항을 안내합니다. 주요 내용인 즉, ‘광장 한복판에서 티나게 있다가는 5분도 안 돼서 다 털려버릴 수 있으니 외곽지역으로 이동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의사항보다는 종교적 열심을 따르는 단체가 대부분이다 보니, 역 광장을 비롯한 중심부에는 아수라장이, 외곽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선물이 거의 닿지 않는 상반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외곽지역을 위한 ‘산타’가 필요해지는 시점입니다.

 

산타 모자, 녹색 목도리와 빨간 장갑으로 무장을 마친 산타 상담원이 외곽지역 출동을 준비합니다. 커다란 등산 가방에 각종 기증품을 넣고, 3리터 보온병에 생강차를 가득 담습니다. 루돌프도 썰매도 없는 뚜벅이 산타의 이마에는 송골 땀이 맺힙니다. 밤이 깊어 차가워진 공기 탓인지 산타의 몸에서는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오릅니다.

 

등짐을 진 채 한참을 걸어 외곽지역 첫 번째 지하도에 도착합니다. 역 광장의 상황을 살피느라 조금 늦게 도착해서인지 많은 이들이 이미 박스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한 바퀴 빙 돌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산타가 왔어요, 생강차가 왔어요’ 홍보를 합니다. 관짝처럼 생긴 박스집이 여기저기서 움찔거립니다. ‘메리크리스마스’ 화답도 들려옵니다. 얼어붙은 몸을 힘들게 일으킨 이들에게 산타가 지닌 것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그렇게 지하도 몇 개를 거치다 보면 어느새 명동 가까이에 이릅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다는 오래된 백화점은 매년 새것으로 크리스마스를 장식합니다. 잠시 인파에 묻혀 산타도 사진을 한장 찍어봅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여럿이 오르내리는 지하도 난간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갑니다. 마지막 지하도입니다.

 

이곳의 유일한 주민인 당뇨발 할아버지는 매번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빈 깡통에 제법 동전이 많이 모였다며 대화를 이어가는데, 대뜸 발을 좀 닦았으면 좋겠답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거부하더니, 산타 모자 효과가 있는 걸까요? 심지어 산타의 선물 주머니에는 양말과 신발도 있습니다. 행여 마음 바뀔세라, 얼른 부축해 가까운 화장실로 향합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경비원이 흔쾌히 허락한 전용 화장실에서 산타의 요술이 펼쳐집니다.

 

화장실을 나서는 산타의 머리에 모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깜빡하고 수건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뇨발 할아버지의 발에는 새 양말과 신발이 신겼습니다. 깡통에 든 동전으로 소주를 사는 대신에 새 양말을 사겠다고 약속합니다. 만날 때 미안하다는 인사는, 헤어질 때 고맙다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산타는 다시 뚜벅 길을 걸어갑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