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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출생기

스펙트럼

오랜 기다림 끝에 아빠가 되었습니다. 신생아를 보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 아이라 그런지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주변에서는 아빠만 닮은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저희 부부에게는 아빠를 닮은 짱구머리와 엄마를 닮은 턱을 비롯해 서로의 것을 골고루 물려받은 아기가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고작 열흘째 바깥 공기를 쐬고 있는 아기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곳곳에 붙여둔 아기 사진과 어딜 가든 핸드폰 갤러리를 보이며 자랑에 여념이 없는 팔불출이 되었습니다. 산후조리원에 산모와 아기를 제외한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아기를 만날 수 없는 지금도 이 정도인데 아기가 집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더 심해질지 조금은 걱정도 됩니다.

 

아내가 아기를 품은 10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임신 초기의 불안감이 사라져갈 때쯤부터 아내의 신체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도울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별 탈 없이 안정기에 접어든 아내와 아기에게 고마운 마음에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열심히 산책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했지만, 막달에 접어들어 음식은 과하고 산책은 부족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어난 아기의 체중에 비해 아내의 신체는 아직 준비가 많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산부인과 주치의로부터 받은 지시에 의해 마치 스님과도 같은 나날을 한참은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지긋지긋한 통밀, 샐러드, 계단 오르기... 고생한 아내에게 못내 고마울 따름입니다.

 

여러 굴곡을 지내다 보니 한편으로는 마음을 안정시킬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현대인의 심신 안정을 위한 특효약, 바로 ‘지름’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각종 전자제품을 구매하고 이를 숭배하며 다음 월급날까지 버텼을 테지만, 이제는 맘카페를 비롯한 수많은 커뮤니티와 구전으로 내려오는 육아 비법에 따라 아기용품을 지르는 것으로 패턴이 변화하였습니다. 아기를 위한 하드웨어가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며 그간 모아왔던 어른의 물건은 중고 시장을 통해 방출되었고, 이제는 집안을 가득 채운 아기용품을 둘러보며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없나 고민해보아도 놓아둘 공간이 없어 이내 마음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드웨어를 구비했으니 소프트웨어를 준비할 차례인데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러 육아 서적을 찾아보아도 남의 얘기로만 들릴 뿐입니다. 분리 수면, 각종 교육에 관련된 내용부터 아이의 필요를 어디까지 채워야 하는지 채 감이 오지 않습니다. 실용적으로 또 철학적으로도 고민해봤지만 초보 아빠의 고민은 깊어갈 뿐입니다. 그러다 문득, 대전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 바라는지, 더 나아가 아이가 보고 자랄 부모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치과의사로서 제 삶이 아이에게 비춰질 때에, 과연 닮아갈 만한 것인지 고민이 듭니다. 처음 치과의사가 되어 환자를 보기 시작했을 때의 다짐이 아직 남아는 있는지, 구강건강 불평등 해소라는 큰 꿈을 가지고 타지로 내려와 수련을 시작한 때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지 떠올려 봅니다. 여러모로 무기력한 전공의 3년차의 하루하루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을 때입니다.

 

다시,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아기 이름 짓기부터 사고의 불을 지펴봅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한 가치를 반영하는 순 한글 이름을 정하고, 생시(生時)와 한자의 획순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인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봅니다. 그리고 저와 제 아내 또한 부모로서,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