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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의료윤리학자에게 물어본다 (51)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가상 사례

박 원장은 의료윤리와 좋은 진료에 관심이 많은 치과의사다. 어느 날, 박 원장은 오랜만에 내원한 청년을 검진했다. 안타깝게도 #36에 고도 우식이 진행되어 근관치료와 보철이 필요한 상태다. 아직 부모님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청년은 진단 및 치료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부모님께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 그래도 부모님도 이가 안 좋아서 관리 잘하라는 말씀을 귀에 피가 나도록 하시는데, 신경치료하고 씌워야 한다는 이야기 들으시면 무척 화를 내실 거예요.” 박 원장, 청년의 요청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어차피 비용은 부모님이 내실 텐데, 말씀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운영해 오던 칼럼을 당분간 사례와 해결의 형식으로 변경하는 점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그리고 한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이런 사례에서 청년의 요청을 무시하는 것은 윤리적 결정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의료적 문제에서 가족의 결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문화권에 속하고, 따라서 무조건 개인의 결정만을 의료적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하기는 어렵지요. 그렇다면, 아무리 청년이 부끄럽거나 심지어 지금 원장에겐 말 못 했지만 상황이 부모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원장은 부모에게 솔직하게 청년의 상황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무엇보다, 비용을 부모님이 내시니까요.

 

하지만, 의료윤리적 접근은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할 것을 요청합니다. 쉽게 말하면, 환자의 요구를 그냥 물리쳐선 안 된다는 것이죠. 심지어 그것이 비합리적이거나 현실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과거엔 의료인, 특히 의사가 스승처럼 환자를 꾸짖고 바른 행동을 제시해주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지지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의료인은 환자가 원하는 것을 일단 듣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환자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환자에게 이득이 되는 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의료윤리의 여러 논쟁들, 대표적으로 존엄사/안락사나 임신중절과 관련된 논쟁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다시 사례로 돌아가지요. 박 원장이 마주한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박 원장은 한편으론 환자의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요청을 따라서 비밀보호를 할 의무를 집니다. 다른 한편으론, 환자 부모의 경제적 책임과 자녀의 구강 건강에 대한 관심을 살필 책임을 집니다. 두 요구는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박 원장의 고민이 크겠네요.

 

제가 생각하는 이 문제의 해결책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환자와 상담을 통해 왜 부모님께 사실을 감추려 하는지 같이 생각해 보고, 부모님과 구강 질환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해 볼 것을 권하거나 치과의사로서 부모님과 청년의 대화를 도와줄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둘째, 청년이 지불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치료를 권하여 환자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환자가 일단 치료받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셋째, 현재 발생한 문제가 오롯이 청년의 책임이 되지 않도록 구강 질환의 요인과 진행에 대한 교육자료를 제공하여 부모님과 다른 방식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첫 번째 해결책부터 살펴볼까요. 이 방안은 환자의 사생활 보호 요구보다는 그의 구강 건강 향상과 부모의 책임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환자의 요청을 묵살하는 대신, 환자에게 현재의 선택을 재고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치과의사 자신이 그 방안에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치과의사에 대한 신뢰와 그가 지닌 설득력이겠지요. 잘 모르는 환자에게 이 방법이 통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이미 환자 및 부모가 가족 주치의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때 시도해 볼 만한 접근법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해결책은 환자의 사생활 보호 요구를 우선시하여, 그에 맞추어 치료 방식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결정은 환자의 구강 건강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보시는 선생님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쪽의 선택이 최종이 되어선 안 된다고 보며, 현재 상황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임시적인 방안임을 환자에게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예컨대, 근관치료 후 코어나 임시 치관까지만 진행한 다음, 몇 달 안에는 보철을 진행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환자에게 확답을 받아놓아야 할 텐데요. 이 부분에서 환자가 다음 치료를 맞추어 진행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많은 선생님들께서 경험적으로 알고 계실 거예요. 따라서, 이쪽은 환자와 선생님이 다른 연결로 알고 있는 경우(예컨대, 지역사회에서 청년만 별도로 마주칠 일이 따로 있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겠지요. 첫 번째나 두 번째 해결책 모두 환자 및 가족과의 관계가 중요할 겁니다.

 

세 번째 해결책은 환자 교육을 통해 환자 및 가족 간의 관계 설정을 변경시키려 시도합니다. 부모님이 환자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구강 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예컨대, 우식 발생은 오직 개인의 구강 관리의 잘못으로 인해서만 발생함) 때문일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인식 변화를 통해 문제 해결에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지요. 일단, 환자에게 권하려고 해도 좋은 교육자료가 별로 없습니다. 교육자료가 있어도 환자와 가족이 선뜻 보려고 할까요. 게다가, 교육자료를 본 순간 인식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치료 결정과 시행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기 쉽습니다. (조건들이 해결되었다고 가정할 때) 저는 이쪽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일한 답으로 제시하지 않는 이유는 그 한계를 제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신 것처럼, 어느 쪽도 쉽고 속 시원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해결책은 각각 한계와 단점이 있지요. 하지만, 현실 문제가 무 자르듯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지요. 쉬운 방법이 있으면 다 그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자를 무시하는 (그래서 환자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결국 치과의사의 신뢰와 존중을 떨어뜨리는) 접근 대신 다른 해결책들이 있다는 인식일 것 같아요. 함께, 더 나은 방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요.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