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수학여행에 가면 장기자랑 대회를 합니다. 학생들이 주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춥니다. 늘 노래와 춤, 둘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구태 의연해 보였는지 수학여행을 앞둔 체육 시간에 체육 선생님께서 이제는 그런 틀에 박힌 것들에서 벗어나 뭔가 창의적인 것을 해봐야 한다고 한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귀담아 들은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장기자랑 대회… 모두가 춤과 노래를 준비하여 나온 가운데 딱 한 팀이 극을 준비해서 나왔습니다. 체육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그 학생들이었죠. 귀추가 주목된 가운데 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빗자루를 든 학생이 무대 위를 왔다 갔다… 오리걸음으로 몇 학생이 무대 위를 지나가고… 전달력이 전혀 없는 극은 그냥 그렇게 뭔가 하나보다 하다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수학여행 무대의 한계였습니다.
결국에는 춤을 잘 춘 학생이 1등, 노래를 잘한 학생이 2등과 3등을 차지하며 장기자랑 대회는 막을 내렸습니다. 체육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학생들은 아무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세트도 조명도 부실하고, 심지어 마이크도 충분치 않은 상황, 체육 선생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말씀을 귀담아 들은 학생들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의료는 의료행정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의료행정이라는 무대의 틀 안에서 의료가 행해지고 유지되는 느낌입니다. 좋은 의료임에도 불구하고 의료행정의 틀을 뛰어 넘지 못하여 사라져간 것들도 있습니다.
치과의 경영도 의료행정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보험 치료 항목과 재료, 수가가 정해져 있고 정해진 틀 안에서 치과를 운영해야 하니,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비보험 치료에 열심을 내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그런 경향이 좀 심해져서 근관치료, 치주치료 등 보험영역의 치료는 하지 않고, 임플란트 치료에만 치중하는 치과들이 다수 생긴 것 같습니다.
무대와 마이크만 달랑 준비된 장기자랑 대회에서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는 것이 정답이듯이, 의료행정이 치과의사의 자율과 환자를 위한 선의를 많이 제한하는 의료환경에서는 광고와 저수가로 환자를 끌어 모아 비보험 진료에 주력, 박리다매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장기자랑 무대에 극을 올린다는 참신한 꿈을 꾸었던 학생들은 칭찬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틀린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무대였습니다. 저수가, 저수준 의료가 득세하는 흐름을 막기 위해서 모종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도전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지 않는 대사를 외쳤던 순수한 학생들에게 특별상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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