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여기 교수님 약력에 보니까 처음 보는 단어가 있어서요. 의철학? 오타 아니죠? 이런 것도 있어요?”
예, 선생님.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단어이실 것 같아요. 의철학(醫哲學)은 philosophy of medicine, 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의학의 철학을 부르는 우리 표현입니다. 국내에서도 “한국의철학회”라는 이름으로 학회가 출범한 지 18년이 다 되어 갑니다. 물론, philosophy of medicine = 의철학은 아니고 의철학이 그 포함하는 영역이 조금 더 넓어요. 당장 한의학 관련한 내용만 넣어도 서구의 그것보다 의철학의 범위가 넓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마침 제가 『의철학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기도 했기 때문에, 책을 소개도 할 겸 의철학이라는 분야에 관해 말씀드려도 좋겠습니다. 의료윤리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싶으실 테고 저도 제 정체성에 약간 혼란이 있긴 합니다만, 하는 사람이 워낙 없다 보니 각 영역으로 전문화를 하기는 어렵고 저는 의철학, 의학사(치의학사), 의료윤리, 서사의학(의료문학)을 다 하고 있어요. 조금 더 말씀드리면, 저는 분야로 전문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로 전문화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의철학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이라는 분야도 사실 정의하기 애매한 구석이 있지요. 원어는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고 합니다만, 그것도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는 보통 인간(과 그가 속한 세계)이란 무엇인가? 앎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 질문이고,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 개념 정의, 성찰, 논리와 직관에 의존합니다. 이게 전부는 아니긴 하지만요. 의학은 (마찬가지로 보통)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풀기 위해 약물과 수술 등에 의존하지요. 하지만 질병과 고통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약물이나 수술만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질병 개념을 살펴보거나 성찰해보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반대로, 인간이나 세계, 앎, 실천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도 성찰이나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의학이 결국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분야라면, 철학의 핵심 문제를 이미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시 말하면, 의학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의학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철학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거지요. 선생님께선 건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마 세계보건기구가 내놓은 질병 없음을 넘어 완전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웰빙 상태라는 정의를 떠올리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쭙습니다. 이 정의, 만족스러우신지요. 선생님께서 진료하실 때의 경험과 세계보건기구의 정의는 아마 여러 부분에서 불일치하고 있을 거예요. 방금 온 환자, 구강 기능 및 형태와 관련하여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웰빙 상태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도 환자한테 좋습니다, 건강하시죠, 다음에 뵐게요, 라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이러면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이겠지요. 우리 진료가 틀렸거나, 세계보건기구가 틀렸거나. 아니면, 개념의 정의라는 것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이 있는 걸까요.
일부 사람들은(정확히는, 몇몇 의철학자들은) 건강이 규범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을 ‘의과학’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계보건기구 정의는 바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오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강이 규범이라면, 다시 말해 해당 개념은 가치판단이나 목표 제시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면, 세계보건기구의 개념을 굳이 수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1948년 제시하여 현재까지 수정하지 않고 건강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과학적인 개념이어서가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굳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세계보건기구의 ‘건강 이상’(health ideal)인 것이지요.
한편, 건강이 규범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료 행위는 이미 어떤 것이 좋고 올바른 것이라는 데에 대한 의료인, 의료계, 더 넓게는 사회의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병이 있다고, 또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속하는 인구 집단을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어떤 식의 변화나 개입이 필요할지를 판가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료인으로서 우리는 늘 건강과 질병을 구분해 왔으므로, 의학은 단지 생물학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인 결정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 인간이 무엇이고 어때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철학적 사고라고 부르지요.
네, 이미 선생님께서 매일 하고 계신 진료가 철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저만 떠올린 것이 아니고, 2천 년 전의 위대한 의사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나 로마의 갈레노스부터 시작해 역사 이래로 계속 내려왔습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희박해진 것이 최근의 특수한 상황이라고 보아야 하지요. 건강에 대해서만 생각해도 이런데, 다른 영역들, 예컨대 질병, 장애, 고통, 죽음, 신체·정신(또는 몸/마음), 의료 기술, 의학적 앎, 증거, 사례, 통계, 데이터, 의료 가치, 진료 질 등을 따져 보면 의학을 한다는 것이 결국 인간 삶의 전체를 생각하는 일이며 철학함이라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철학을 모른다고 진료를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금 철학을 가르치고 있지도 않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며, 이미 선생님들께서도 자신만의, 또는 속한 전문 분과나 학회의 철학을, 또한 우리 사회의 관점을 알게 모르게 수용하고 수정하고 계십니다. 이를 드러내서 다룰 때에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은 방식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선생님께 의철학을 권했습니다. 흥미로우실 수도 있을 것 같고, 그저 현학적인 고담준론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리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느 쪽이시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미 선생님께선 꽤 관심이 있으신 것을 의미하므로, 다음은 분야의 쉬운 책들, 예컨대 제가 이번에 번역하여 소개한 『의철학 입문』을 읽어보실 차례입니다. 함께 생각해주시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치의학을 분명하게 살피고 다음의 치의학으로 넘어가는 여정에 동참해주시기를 청해봅니다.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