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20일부터 ‘요양기관 본인확인 강화 제도’가 전격 시행된다고 한다. 의료기관에서 진료에 앞서 신분증 등으로 본인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제도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건강보험 자격이 없거나, 타인 명의로 향정신성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해 건강보험증 등을 대여·도용하는 부정수급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을 예방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에 관련하여 ‘요양기관은 가입자 또는 피부양자에게 요양급여를 실시하는 경우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건강보험증이나 신분증명서로 본인 여부 및 그 자격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국민건강보험법 제12조 4항을 신설하고 연관된 5-8항을 전면 개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에 따르면 의료기관에는 본인확인을 시행할 의무뿐만 아니라 본인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책임도 뒤따른다. 국민건강보험법 과태료 조항을 살펴보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건강보험증이나 신분증명서로 가입자 또는 피부양자의 본인 여부 및 그 자격을 확인하지 아니하고 요양급여를 실시한 자에 대해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만약 환자가 위조된 신분증을 통해 건강보험 진료를 받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건보공단이 배포한 ‘요양기관 본인확인 강화 제도 설명자료’에 따르면 ‘수진자가 타인의 신분증을 도용·대여해 진료받은 경우, 요양기관이 통상적인 주의를 기울여 본인확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신분증인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과태료 및 부당이득금이 부과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법 조항에는 이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통상적인 주의’를 어디까지로 한정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이대로 제도가 시행된다면 향후 법 적용시 의료기관은 의무를 다한 선량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과태료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별도의 원무과를 두고 있는 대형병원과 달리, 우리 치과의사회원들 중에 가장 많은 업태인 의원급의 경우 접수시에 본인확인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행정적 부담도 커진다.
건강보험과 관련된 법령이 시대흐름에 맞게 개정되는 것은 필요한 절차이다. 건강보험의 부정 수급을 방지하기 위해 신분증을 확인하는 제도가 생기는 것도 좋다. 다만 제도를 서둘러 시행하기에 앞서,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이나 여러 경우의 수를 미리 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로 인해 청구대행 등의 많은 행정업무를 떠안고 있는 의료기관이 이번에도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가?
당장 올해 10월 시행을 앞둔 보험업법 개정의 경우를 보아도 보건당국이 의료기관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보험업법에 따르면 모든 요양기관에 실손보험 관련 서류전송의 의무가 부과되며, 그 시스템 구축의 비용을 보험사가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간 의료계에서 구축된 간소화 시스템을 확장할 수 있음에도, 지난 2월 금융위원회는 ‘보험개발원’을 전송대행기관으로 발표하였다.
보험업법 개정안은 보험사간 공유전산망에 가까운 보험신용정보시스템(ICIS)에 국민의 민감 의료정보가 축적 관리되게 만든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 환자의 의료정보의 전자적 프로파일링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음에 비추어, 현행대로면 ICIS는 수집한 개인의 의료정보를 토대로 청구된 진료비 거부나 가입에 차등을 두는 등 국민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또한 보험업법 개정안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의료정보 사본 교부 및 열람을 세세하게 규정하는 의료법 21조와도 배치된다. 그러기에 대한치과의사협회를 비롯한 4개 의약단체는 보험업법 개정안의 전면 수정을 촉구하여왔다.
더구나 실손보험이 민간보험사와 가입자 간의 사적계약에 불과함에도, 진료를 수행했다는 이유로 계약당사자가 아닌 의료기관에 강제적 의무를 법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의료기관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강요이다. 스스럼없이 행하는 이런 강제와 그간 코로나사태 등을 거치며 보인 보건당국의 태도는 의료인을 아무 때나 추가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만능 도구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는 1977년 출범되어 점차 수급대상을 확대하여가다 1989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누구나 부담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자랑거리로 자리매김되었다. 여기에는 그간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한 덕도 있고, 보건당국에서 제도를 꾸준히 정비한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재정이 빈한한 건강보험사업이라는 수레를 궤도에 올린 데에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묵묵히 환자 진료에 힘쓴 의료인들의 희생도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수레의 양쪽 두 바퀴가 순조롭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양쪽의 바퀴가 동일하고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균형이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를 의미한다. 한쪽 바퀴에만 과도한 압력이 주어진다거나, 한쪽 바퀴에만 과도한 피로가 중첩되는데도 이를 보수하고 개선할 방도를 만들지 않는다면, 조만간 수레가 엎어질 미래가 있을 뿐이다. 과도한 압박이나 사리에 맞지 않는 명령으로 의료인이라는 파트너를 억지로 끌고 가는 방식을 그만두시기 바란다. 양쪽 바퀴가 동등하게 함께 굴러야 수레가 전진할 수 있다.
우리 치과의사는 국민건강사업의 파트너로서 보건당국으로부터 의당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업 진행에 앞서 미리 함께 의논하고 치과계의 의견을 반영해 기울어짐 없는 정책이 수립되기를 바란다. 서로 믿고 고마워하는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여야, 지속적이고 균형 잡힌 국민건강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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