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어느 날, 박 원장을 노인 신환이 찾아왔다. 환자는 76세의 고령으로 심장판막 수술과 당뇨 등으로 와파린을 포함한 여러 약을 복용하고 있는 상태다. 환자의 주소는 치아 통증이었고, 구강검진 결과 다수 치아의 치근우식으로 살릴 수 있는 치아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상태였다. 박 원장은 환자의 전신 상태와 감염 시 합병증을 고려하였을 때 전악 발치 후 완전틀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환자에게 설명하였다. 환자는 박 원장의 치료 계획이 이해는 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다. 갑자기 이를 다 뽑고 틀니라니. 물론 지병 때문에 천천히 치료하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했고 보험 진료니 박 원장이 돈을 벌려고 이렇게 권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위 사례, 크게 고민되는 경우는 아니실 수도 있겠습니다. 원장님의 치료 계획이 타당한데 괜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자가 문제니 환자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이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의과력이나 다른 상황을 고려할 때 원장님의 계획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점은 고민이 되지 않으실까요. 애써 좋은, 환자에게 맞는 치료 계획을 세워서 잘 치료를 마쳤는데 환자가 별로 만족하지 않는 상황 말입니다. 위 사례의 경우, 전악 발치 후 완전틀니는 객관적으로 옳은 치료 계획으로 보이고, 이를 환자와 진행하는 것은 문제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환자가 치료가 다 끝나고 이에 대해 불쾌감이나 불편감을 이야기한다면, 마음이 언짢은 원장님들이 계실 거예요. “교과서대로” 잘 치료해 주었는데, 우리 환자는 왜 이럴까 하고 말이죠.
우리는 치의학적인 관점에서 환자에게 좋은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교과서, 논문, 지침 등을 근거로 삼아 환자에게 무엇이 더 나은 방법인지를 고민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치료를 통해 환자가 얻는 “객관적인” 이득입니다. 치료 결과는 치과의사가 보아도, 환자가 보아도, 사회가 보아도 모두 이득인 방향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또한, 의료인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것으로 기대받고 있으며 그렇게 행동할 것이므로, 이때 결과는 환자에게 있어 객관적인 최선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물론, 진료의 한계상 치료 결과가 늘 완벽할 수는 없으나, 그런 결과를 이루기 위해 의료인이 노력을 다한 것으로 충분하지요.
위 사례에서 원장님의 치료 계획 또한 이런 범주에 속할 겁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와파린을 자주 끊는 것이 어려운 데다가 당뇨로 인한 감염 위험이 높아져 있는 환자의 현 전신상태상, 한 번에 전악 발치 후 틀니로 진행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에선 이런 객관적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주장, 사실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죠. 이득은 객관적으로 따져야 할 성질의 것이며, 건강과 질병의 문제에선 특히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이 남들과는 다른 특정한 치료나 결과를 요구한다고 하여, 의료인이 그것을 이루어 주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통계, 안정적인 결과, 다수가 인정할 수 있는 방향이니까요.
이런 생각에 비판적으로 응답한 철학자로 로버트 노직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경험 기계”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사고실험이란 철학의 강력한 도구 중 하나로서, 실제로 실험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머릿속으로 조건, 진행, 귀결을 사유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험 기계 실험에서, 노직은 묻습니다. 여기에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있습니다(1970년대에 이 주장을 한 노직은 ‘수조’를 제안합니다만, 저희에겐 현실에서 그런 역할을 하리라 보이는 기계가 이미 연구개발 중임을 알고 있지요). 이 인터페이스에 연결되면, 사용자는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가 주는 만족과 기쁨을 “가상으로” 누리며 평생 살아가게 됩니다. 노직은 방향을 돌려서 묻지요. 자, 이 인터페이스에 연결되어 가만히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우리에겐 그저 즐겁고 기쁜 일을 넘어선 삶의 목적과 바람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은 기계에 접속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실 세계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가 경험의 ‘진정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치롭게 여긴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좋은 것은 단순한 만족을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누가 보아도 ‘만족’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실현된다면, 컴퓨터가 뇌로 직접 전달하는 ‘만족’은 매우 객관적인 결과물일테니까요).
이를 앞서 말한 치료로 인한 객관적 이득이라는 생각에 겹쳐 본다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 객관적 이득만으로 환자가 만족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아니 사실 의료에서 객관적인 만족만을 따지는 것은 전부가 아닌지 말이죠. 의료에서 “환자의 최선의 이득”이라는 것은 의학적 객관성으로 본 환자 신체상의 이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최선의 이득을 가져오고자 추구할 때, 의료인은 객관성을 넘어 환자의 진정성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환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의 삶에서 이 치료를 통해 환자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이것을 그저 관찰해선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환자와 대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역으로도 마찬가지이지요. 환자 또한, 치과의사가 이 치료 과정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고 있으며 자신의 좋음을 바란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치과의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저 얼굴만 보고, 관상으로 따져 물을 수는 없는 것이죠.
정리하면,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란 결국 환자와의 대화로 귀결됩니다. 물론, 치과의사의 치의학적 소견은 무엇보다 중요한 전문가의 견해이자 의견이며, 이것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견해가 존중받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결국 환자에게 얼마나 진정성 있는 자세로 이야기하느냐일 겁니다. 위 사례의 원장님 또한, 환자가 천천히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런 방향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과 한계를 설명해 주신다면 더 좋겠지요. 대화 과정에서 치료 계획이 일부 수정되어도 괜찮겠다고 판단하신다면, 그것도 가치 있는 접근일 것이고요.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