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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스펙트럼

의사가 병원 밖, 환자가 있는 곳에 가서 진료하는 것을 왕진이라고 하죠. 의사와 간호사가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고령의 환자를 찾아가 진료를 하는 것이 왕진의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진료 장비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되는 치과의사에게 있어 왕진이라는 것은 좀 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왕진의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40대 남자, 전신적으로 건강하신 환자분이었습니다. 치주적으로 다소 병적인 부분이 있어 치주소파술을 하고 귀가하시게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환자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입에서 피가 나고 있는데 집에서 넘어진 탓에 허리를 다쳐 치과에 갈 수 없다며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계신 분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동식 석션이 치과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개원 초였고 환자가 워낙 없던 때라 예약도 없었습니다.

 

이동식 석션을 가지고 직원 한 명을 대동하여 환자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치과를 끼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환자분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차를 운전하여 금방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분께서 허리를 부여잡고 계셨고, 입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동식 석션과 거즈 등을 이용해서 출혈은 금방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분께서는 넘어져 다치신 탓에 경황이 없으셨고, 생각하지 못했던 출혈을 겪으신 탓에 많이 당황스러워 보였습니다. 시술적 요인보다는 전신적 소인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을 드리고 재차 출혈이 발생하였을 때의 대응에 대해 안내를 드린 후 집을 나섰습니다.

 

지금은 생각지도 못할 왕진이었습니다. 원장이 치과를 비우고 왕진을 나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낯선, 상황 판단 능력이 다소 부족한 초보 원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가까운 사이도 아니면서 왕진까지 하는 것은 출혈의 원인이 시술에 있다고 인정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행히, 부족한 판단 아래 이루어진 일이 치과의 환자 풀을 한 뼘 키우는 일이 되었습니다. 제가 왕진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왕진해줘서 고맙다며 저희 치과의 단골손님이 되셨고 임플란트 치료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순수한 마음으로 했던 왕진이 오해를 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렇게 모은 구환들은 광고나 블로그를 통해 모인 환자들과는 달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문가가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실천을 보일 때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환자의 동의를 얻어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망각하고 지내는 지도 모릅니다. 과연, 요즘 치과 운영에 적용되고 있는 경영 원리는 문제가 없는 것인지, 저는 많이 우려가 됩니다. 심리기법에 물든 치과 치료 상담, 저가, 공장식 의료가 대세로 되어가는 흐름을 좀처럼 역전시키지 못한 채 이대로 의술로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처신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좋은 경영을 지속하면 ‘원장님이 좋으신 대로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환자분들이 많아집니다. 상담이 길지 않습니다. 스케줄과 선택지에 대한 짧은 의견 교환이 전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직원들도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말과 생각이 선순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치과 운영의 열쇠를 가진 우리 치과의사들이 한 번 더 생각하고 치과계 생태계를 지키는 선택을 해야 됨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치과 운영의 어려움 속에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들, 치열하게 경쟁하느라 방향을 잃어버린 치과의사들이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