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의 흥행으로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늘었습니다. “every second counts”라는 구절로 유명한 “더 베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시카고 파인다이닝을 배경으로 가족, 직원, 친구에 대해 매우 좁은 화각으로 파고든 작품이며 올해 골든글로브 3관왕을 수상한 수작 입니다. 저는 개원가의 원장으로서 이 작품을 즐기면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을 지키고 싶어하는(변화를 싫어하는) 직원들, 능력은 있지만 선을 넘는(건방진) 후배 쉐프, 하루가 멀다하고 역류하는 화장실 변기, 낙후된 시설과 장비로 인한 고장들 그리고 화가 잔뜩 난 환자… 아니 손님들. “every second counts” 그럼에도, 레스토랑은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십니까? 저는 병원 지하주차장에서 그 날의 환자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일과의 스위치를 켭니다. 스케줄을 보다 보면, 병원 올라가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진행이 잘 안되는 환자가 스케줄에 보일 때, 직원들과의 사소한 마찰로 인사하기도 버거울 때, 한꺼번에 여러 고가 장비가 고장일 때, 환자가 많을 때, 환자가 적을 때… 사실, 굳이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하루가 힘들 것 같은 날. 스위치가 쉽사리 켜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좋아했었습니다. 저의 첫 매복사랑니 발치 케이스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였습니다. 학생케이스로 꼬시기 위해 몇 번의 맥주를 샀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술 전 날 세, 네 번의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나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고, 수술 당일 한 시간이 넘는 고생 끝에 발치를 끝냈습니다. 첫 발치 때, 치근이 치조골에서 빠져나올 때의 희열을 잊을 치과의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열정의 고점은 개원을 준비할 때 아니었을까요. 매일 인테리어를 점검하고, 새로운 직원들과 환자 동선을 논의하고, 명찰부터 대기실의 오브제 하나까지 우리의 고민이 머물지 않은 지점은 없었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내 열정의 온도는 변곡점을 돌게 된 걸까요.
내 열정, 내 성취감, 내 경쟁력의 온도가 식기 시작한 건 “이 정도면 만족해” 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보철물이면 씹을 때는 문제없어.’ ‘이 정도면 매복 사랑니 치고 안부은거지.’ ‘상악동거상술 하고 아픈 건 당연한 거야.’ 이 정도면, 이 정도면… 다른 이의 진료와 결과물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개인병원에서 자기 진료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괴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합니다. 자괴감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로, 저는 저의 열정을 과거에 묻었습니다.
“더 베어”의 주인공이 선배에게 묻습니다. “혹시, 비결이라도 있어요? 당신은 항상 의욕적이잖아요.” 선배는 별거냐는 듯 답합니다. “당신만 알고 있어요. 잘난 사람들을 주변에 두려고 해요. 매일 매일이 부러움과 자괴감으로 가득할 거예요.” 돌이켜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 제 주변에는 잘난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몇 분 만에 족보 몇 페이지 외우는 게 일상인 동기, 카리스마 넘치던 레지던트 선생님들, 진료-강의-인격까지 모두 갖춘 교수님들. 어떻게 하면, 부러움과 자괴감이 넘치던 그 때의 열정 재료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저는 치과의사들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유튜브 채널 “저스트 덴티스트”를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타 치과의 브랜딩, 임플란트 테크닉, 트렌디한 장비들에 대해 그만하라고 할 때 까지 얘기 해줄 동료들을 모시고 촬영을 했습니다. 내 곁에 잘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저가 임플란트에 초저가로 대응할 때, 이 분들은 100년은 버틸만한 임플란트를, 수가보다 높은 환자만족도를, 확고한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갑니다. 그 분들의 식견을, 취향을, 전략을 캐내면서 과거에 묵혀두었던 저의 열정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이 매일 똑같은 일과에 지쳐가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면, 잠시 들러서 잘난 저희 게스트들을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열정을 되찾아 드립니다.